올해는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다. 임인은 육십갑자의 39번째로 천간의 ‘임(壬)’은 오방색 중 북쪽 흑색을, ‘인(寅)’은 열두 동물 중 호랑이를 상징한다.
호랑이와 우리 민족의 관계는 단군신화를 비롯해 반구대 암각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거울의 문양과 허리띠 장식 등 청동기 유적에서도 등장한다.
이후 고구려 고분 널방 벽화에서 호랑이는 방위신 중 하나인 서방의 수호신(守護神)으로 등장하는데, 고려시대 상류층 무덤의 석실 사면을 조각한 ‘사신도’와 조선시대 왕실의 산릉을 조성할 때 왕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을 능에 안치하기 전 임시로 두었던 찬궁(欑宮)의 사면에 그려 붙인 ‘사수도(四獸圖)’의 백호도 같은 맥락에서 그려진 것이다(그림1. 백호, 『장릉봉릉도감의궤』, 1698년, 장서각).
조선시대 무관(武官)의 공신 초상화 흉배에 호표(虎豹)를 수놓아 품계를 표시했던 것도 그 용맹함에서 기인한 것이다(그림2. <조경(趙儆) 초상>의 호문 흉배,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문무관 초상화의 교의에 호피를 걸쳐 깔고 앉아 호랑이 머리 부분을 초상 인물의 두 발 사이에 드러나게 해 그 위의(威儀)를 더했다.
조선시대 일반 회화에서 호랑이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맹호도>는 정면을 매섭게 응시하는 호랑이가 꼬리를 S자로 치켜올린 모습으로 호랑이의 터럭이 한 올 한 올 생동감 있게 묘사돼 신통력을 지닌 영물의 기백을 잘 보여준다(그림3. 전 심사정, <맹호도>,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특히 호랑이가 자생하지 못한 일본에서는 통신사 화원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화제가 맹호도였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았다. 또한 액막이용으로 다양한 호피 무늬가 잘 드러나도록 펼쳐 그린 축이나 병풍을 제작해 집안을 장식했다.
조선시대에는 정월 초에 나쁜 기운을 쫓고 복을 맞이하기 위해 문비(門扉)나 대청에 세화(歲畫)를 붙였다. 19세기 이후에는 호랑이 그림이 민간으로 확산돼 맹호도 형식에 길상을 상징하는 까치를 그려 민화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발전했다.
나무 위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호작도(虎鵲圖)는 민간에서 벽사와 길상의 기능 외에도 사회를 풍자하는 설화나 서민적 요소가 더해져 해학적으로 그려졌다.
한편 불교 회화에서는 산신(山神)의 정령으로 상징된다. 『화엄경』 제4권에 등장하는 불법의 수호신들 중 주산신(主山神)이 민간신앙과 결합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18세기 중후반 이후 각 마을의 동제당(洞祭堂)에 모셨던 산신도를 사찰의 산신각에 봉안했다.
산신도에서 호랑이는 소나무 아래 부채를 든 산신 옆에 앉은 모습으로 등장해 산신을 의인화한 ‘산왕(山王)’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조선 말기 세도가에서는 호랑이와 관련된 공예품이 다양하게 사용됐다. 호랑이 이빨이나 발톱을 패물 노리개 장식으로 사용하거나 나전칠기로 호랑이를 묘사한 베개 마구리, 호랑이의 네 다리 모양을 소반 아래 장식한 호족반상(虎足盤床)이 대표적 사례다.
최남선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郎, 1865~1935)가 우리 국토를 토끼 형상으로 폄하한 것을 비판하며, 자신이 창간한 『소년지』에 대륙을 향해 도약하는 맹호에 비유한 한반도 형상 삽화를 넣기도 했다.
그는 우리 강산을 맹호의 기상에 빗대 호랑이 머리를 백두산에, 몸통의 줄무늬를 백두대간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로 묘사했다(그림4. 호랑이 지도, 『소년지』 창간호, 1908년).
마지막으로 ‘대인호변(大人虎變)’은 『주역』의 64괘 중 혁괘(革卦)에서 나온 말로, 호랑이가 털갈이를 한 후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처럼 대인이 천하를 혁신해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를 지닌 고사성어다.
임인년 새해는 우리 민족이 ‘절륜한 용기로 세계로 웅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차게 도약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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