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로소(耆老所, 별칭 耆社)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을 예우하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관서다.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종친과 문신에게 기로소에 입사할 자격이 주어졌기에 그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신 중 윤경(尹絅, 1567~1664)은 1645년 79세 때 입사해 98세까지 장수한 인물로 이름을 올렸다.
조선 국왕 중 태조는 60세인 1394년 기영회에 들어갔다고 전하고, 숙종(1661~1720)은 1719년 59세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특히 영조(1694~1776)는 반세기가 넘는 52년을 재위에 있었고, 82년의 삶을 영위해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했으나, 비교적 이른 나이인 51세에 기로소에 입사했다.
영조는 1736년 모친의 사당인 육상궁에서 환궁하는 길에 기로소로 처음 행차해 영수각에서 전배하고 숙종의 어첩을 열람하며 감회에 젖었다. 연잉군 시절이던 1719년에 자신이 숙종에게 태조의 전례에 따라 기로소에 입사할 것을 진언했음을 상기하며, 영조 자신도 숙종의 일을 계술(繼述)해 기로소에 들어가려는 의지를 밝혔다.
이후 영조는 1743년 50세에 주강에서 기사(耆社)에 이름을 쓰는 것이 평소 뜻한 바임을 밝힌 데 이어, 이듬해 여은군 이매가 51세의 영조에게 태조와 숙종의 고사를 계술해 기로소에 들 것을 진언하면서 비록 숙종의 입사 나이보다 8살 아래지만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는 다르지 않다고 설득했다.
이후 대신들과 기로소 당상들이 영조의 기로소 입사에 대한 상소를 계속 올리자 영조는 입사를 허락하는 교서를 내렸다. 한편 숙종의 전례처럼 59세 이후 입사할 것을 주장한 지평 박성원 등을 삭탈관직하고 섬으로 유배 보낼 만큼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1744년 영조의 기로소 입사 의례는 영수각에서 궤장(几杖)을 받고 어첩에 직접 자신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써서 보관하는 것으로 대신했으며, 숭정전에서 진하를 받고 기로소의 기영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해 제작한 것이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다(그림1).
이렇듯 영조가 기로소 입사를 서두른 이유는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1687~1757)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경로잔치를 통해 효 사상을 부각시키고, 숙종의 입사를 경험한 신료들과 백성들이 영조의 기로행사를 목격함으로써 그 의미가 배가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1744년 편찬한 『속대전』, 『국조속오례의』 등 국가전례서에 자신의 입사 사실을 수록해 전례로 남기려는 의지도 있었다.
영조가 15차례나 기로소를 방문해 영수각(靈壽閣)에 보관한 숙종의 《기사계첩(耆社契帖)》에 전배(展拜)하고 기로 대신들과 함께한 행사를 기록한 그림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영수각송》과 《친림선온도》는 1765년 72세를 맞은 영조가 왕세손을 대동하고 기로소를 방문해 어첩을 봉안한 영수각에 전배하고 그 서쪽에 있는 기영관(耆英館)에서 기로신에게 술을 내려 선온(宣醞)한 일을 기념해 제작한 것이다. 영조의 전교, 행사 그림, 판중추부사 이정보의 발문, 입시한 기로신의 성명과 직함을 차례로 기록했다.
그림 우측 전배례를 마친 후 영수각 내 어첩을 보관하는 벽감의 문이 닫혀 있고, 뜰에는 어로 우측에 영조와 왕세손을 위한 판위가 보인다. 화면 좌측 기영관의 북벽에는 일월오봉도 앞에 어좌가 있으며, 그 우측 아래 왕세손의 자리가 있는데, 조선시대 기록화의 전통에서 국왕과 세자 또는 세손의 모습은 그리지 않고 그 상징물로 대신했기에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국구(國舅)와 의빈(儀賓) 등 왕실 인척과 8인의 기로 대신들이 어좌를 향해 앉았고, 어좌의 좌측 아래 영조가 내린 술 항아리가 놓여 있다. 어좌 양옆에는 영조가 입사할 때 올렸던 구장(鳩杖)과 왕의 익선관에 꽂는 사권화(絲圈花)를 보관하는 주칠함을 받든 관원이 시립했다. 뜰에는 영조가 타고 온 여(輿)를 중심으로 의장을 든 차비와 화살을 멘 호위군관이 열립했다(그림2).
《영수각송》과 《친림선온도》 외에 1점이 더 제작됐는데, 영조의 어람과 세손의 예람에 대비하고, 영수각에서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가 1762년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여러 차례 왕세손을 데리고 기로소 의례를 진행하고 남긴 기록과 그림은 《영수각송》과 《친림선온도》 외에도 1763년 『기영각시첩』, 1765년 기로연을 묘사한 병풍 등이 전한다. 영조가 기로소 의례를 반복해서 제작하게 한 이유는 태조와 숙종의 전례를 계승한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기로 대신들 앞에서 자신의 적통으로서 왕세손의 입지를 굳히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장서각 온라인전시관 ‘조선의 중흥군주 영조대왕’
특별기고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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