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필지(士民必知)』는 육영공원의 초대 교사로 한국에 온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1891년에 펴낸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과서다.
먼저 태양계와 지구에 대해 설명한 뒤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각 대륙에 속한 60여 개 국가들을 소개했다.
각 국가의 위치를 경도와 위도로 설명하고 면적, 지형, 기후, 소산물, 인구, 종족, 언어, 정치 체제, 주요 도시, 생산품, 수출입품, 군사력, 교육 제도, 종교 등 각국에 대한 당대 최신의 정보를 제시했다. 또한 본문 외에도 태양계 궤도와 세계지도, 대륙별 지도를 수록했다.
육영공원은 1886년 조선 정부가 근대식 교육을 위해 세운 왕립 학교로 헐버트는 이 학교에서 조선의 문무 관리들과 양반 자제들을 교육했다. 당시 조선은 여러 국가들과 차례차례 통상 조약을 맺어 가고 있었는데 헐버트는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세계 지리와 국제관계에 대한 교육이라고 판단했다.
『사민필지』는 육영공원을 비롯해 배재학당, 한성사범학교, 숭실학교, 경신학교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식 학교에서 교과서로 널리 활용되며 당시 조선인들이 근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민필지』에는 세계 각국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뿐 아니라 헐버트의 개인적인 관점도 담겨 있다. 인종에 대해 설명하며 백인종이 아메리카, 호주,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 원주민들을 몰아냈다고 하며 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기도 했고, 중국의 아편 문제를 지적하며 그 책임이 영국에 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이는 아시아가 열강의 진출 무대로 떠오른 상황에서 조선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의도로 이해된다.
헐버트는 국가별 서술의 마지막에 그 나라의 특이한 점을 간략히 덧붙였는데, 이는 학생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돋우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대한 서술에서 유럽과 아메리카에는 1년에 몇 번씩 의복의 모양을 바꾸는 풍속이 있는데 새로운 의복의 모양이 모두 프랑스에서 나온다고 했고,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원숭이로 환생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원숭이에게 좋은 집과 음식을 대접한다고 했다.
또한 칠레의 안데스산맥은 너무 높아 공기가 적기 때문에 이 산에서는 무슨 일이든 두 시간 이상을 할 수 없고, 더 오래 하면 코피가 난다고 했다.
『사민필지』는 언어적으로도 살펴볼 부분이 많다. 일단 『사민필지』에는 한자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즉 표지부터 본문까지 책 전체가 한글로만 작성된 것이다. 학문의 언어가 한문이었던 19세기 말에 지식서를 한글로 간행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헐버트는 일반인들에 대한 보통 교육을 강조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이 그 매개체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士)와 백성(民)이 모두 반드시(必) 알아야(知) 할’ 내용을 담은 『사민필지』를 순 한글로 간행한 것이다.
서문에서 헐버트는 조선 사람들이 중국 글자를 숭상하지만 조선의 글자는 한글이며, 한자로 쓰면 모든 사람이 빨리 읽을 수 없는 반면 한글은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모두 널리 보고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1896년에 창간된 것을 고려하면 그보다 5년이나 앞선 헐버트의 탁견에 감탄을 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한글로 된 책은 아녀자들이 읽는 것으로 여겨져 천시됐지만 『사민필지』는 그 내용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895년에 의정부 관리들이 이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전통적으로 한문 문헌이 국문으로 언해되는 것이 일반적인 번역의 방향인데 『사민필지』는 역방향으로 번역이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특이성이 있다.
이처럼 『사민필지』는 조선인들의 근대 세계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저작이자 당대인들에게 한글이 갖는 가치와 가능성을 입증해 준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특별기고 안예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국어학 전공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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