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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이야기 속으로] 장수와 영예의 상징, 궤장(几杖)

현전하는 유일한 궤장인 이경석의 궤장과 사궤장 연회도 화첩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4/09/22 [15:2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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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석 궤장(1987년 보물 지정). 사진출처: 경기도박물관  © 비전성남

 

분당구 석운동 송유관공사 근처에 다다르면, ‘이경석 선생 묘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묘소에 묻힌 이는 조선 인조, 효종, 현종 대에 걸쳐 활약한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문장과 관료로서의 능력 때문에 고초도 많이 겪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치욕적인 항복을 했던 장소인 삼전도에 세울 청 태종의 공덕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통칭 삼전도비)’ 비문을 쓸 사람으로 선발되자, 글을 배운 것을 후회한다는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명나라 배가 몰래 조선에 들어온 일이 적발되거나, 효종의 북벌정책이 청나라에 밀고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모든 책임을 자처해 죽음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특히 삼전도비 비문을 지은 일은, 반청 감정이 강했던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훗날까지 약점으로 지적됐다.

 

관료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영의정을 역임하고 70이 넘도록 장수했다. 그리하여 74세가 되던 1668(현종 9)에 궤장을 하사받았다.

 

궤장(几杖)이란 접이식 의자인 궤()와 지팡이인 장()을 가리키는데,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70세가 넘은 신하 가운데 왕의 신임이 두터운 이에게 내려진다. 궤장을 내려 줄 때에는 하사주인 선온(宣醞)과 국왕의 교서, 1등급의 음악도 함께 하사됐다.


▲ 사궤장 연회도 화첩(1987년 보물 지정). 사진출처: 경기도박물관  © 비전성남

 

조선 후기에 궤장을 받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광을 뜻했기에, 지인들을 초대해 큰 연회를 베푸는 것이 당시의 예절이자 관습이었다.

 

이경석 역시 연회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화원에게 의뢰해 궤장을 받는 행사를 그림으로 그리고 친분이 있는 명사들의 축시를 받아 화첩으로 엮어냈다.

 

궤장의 실물과 함께 연회도첩, 교서까지 일괄해 전해지는 경우는 이경석의 사례가 유일하다. 2품 이상의 관직에 도달하기도 쉽지 않은 데다, 70세가 넘도록 장수하는 이도 흔치 않다 보니 그 사례를 쉽사리 찾을 수는 없다.

 

또한 조선시대의 인생 보드게임 격인 종경도(從卿圖)에서도 사궤장(賜几杖)을 최종 승리로 설정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궤장에 대해 세기적인 영광이라던가 조선 초기에는 궤장을 받은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는 오해(?)가 생겨난 듯하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만 검색해 보더라도, 궤장은 조선 초기부터 칠순이 넘은 2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종종 하사됐다. 조선 초기에는 칠순에 다다른 고위 신하가 사직을 청할 때, 이를 만류하고 벼슬살이를 계속하라는 뜻으로 궤장을 내려줬다.

 

국왕의 입장에서도 궤장은 원로 대신을 공경하며 예우하는 덕을 나타내는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조건만 갖춘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후기에는 상대적으로 사례가 적은 편인데, 조선 초기와 비교해서 적을 따름이지 꾸준히 궤장을 내려 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궤장의 사회적 의미가 신격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실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데다, 후손들이 조상의 공덕을 내세워 가문의 격을 높이는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궤장에 대해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현전하는 유일한 궤장인 이경석의 궤장과 사궤장 연회도 화첩은 후손들이 경기도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위탁했고, 현재는 완전히 기증해 복원과 보존 처리를 거쳐 일반에 전시되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날씨가 선선한 가을날, 박물관을 찾아 유물을 관람하면서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도 괜찮은 여가 활동이 아닌가 싶다.

 

특별기고 이대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전공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