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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시시왕래(時時往來)와 삭삭왕래(數數往來)

  • 관리자 | 기사입력 2013/02/21 [15:0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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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 전 경상도 안동지방 어느 양반집에 곱게 나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바로 안동 군자리 광산김씨 집안의 황씨 할머니 이야기다.

그의 친정 또한 대갓집이어서 이 할머니는 친정으로부터 큰 재산을 상속받아 남편을 맞아들였다.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남편이 장가를 온 것이다.

황씨 할머니는 성년이 되고 나이가 들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고 외롭지도 않았다. 이 할머니에게는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시양아들과 수양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이 다할 무렵, 황씨 할머니는 일체의 재산을 가지고 분재(分財), 즉 상속을 단행했다. 분재를 하기 전에 할머니는 분재 대상자들에 대해 논공(論功)을 시행했다. 

살아생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상벌을 따지고 그에 따라 재산의 양을 조절하기 위함이었다. 자식들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재산을 상속해주는 요즘과 매우 달랐다.

그녀가 일찌감치 시양아들과 수양딸을 둔 것은 평상시 일상생활과 노후를 위한 대비책이었다. 황씨 할머니는 자식을 두지 못한 경우이지만 자식을 여럿 둔 경우에도 시양자, 수양녀를 두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내가 병들고 어려울 때, 늙을 때에는 반드시 친자식이 내게 잘한다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친아들과 조카들, 그리고 시양자 수양녀들에게 충성 경쟁을 시킨다. 재산을 매개로 효도(孝道) 경쟁을 시킨 것이다.

단언컨대 옛 사람들이 효도를 다했다는 것은, 부모의 뒷날 재산 분배에 대한 약속이 전제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에 옛 사람들은 반드시 임종 즈음에야 재산을 상속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을 기약못하고, 저녁이 되면 내일 아침을 기약하지 못하는’그 순간이 돼야 분재를 하곤 했다.

다시 황씨 할머니의 분재에 대한 논공 사실을 살펴보자. 

시양딸 아무개는 내가 죽을 때를 대비해 튼튼한 관곽(棺槨)을 준비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발꿈치가 닳도록 내 집에 출입했고, 병이 들어 아플 때에는 마음을 다해 보살펴줬다(盡情侍養). 

손자 아무개는 시도 때도 없이 왕래하며 효도를 다했다(時時往來孝道). 손녀 아무개는 그 남편이 사망한 가운데서도 내왕하며 효도했다(來往孝道). 

또 다른 손녀 권숙평의 처 김씨는 자주 자주 내왕하며 효도(數數往來孝道)했다. 손자 아무개는 어릴 때부터 내게 찾아와 효도했고, 병이 났을 때 밤낮으로 드나들며 보살펴줬다.

이쯤이면 황씨 할머니의 효도 평가 기준을 알 수 있다. 바로 ‘시시왕래(時時往來)’, ‘삭삭왕래(數數往來)’가 평가의 제일 항목이었던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내게 자주 자주 찾아오는 것’이 가중 중요한 덕목이었다. 어른들, 부모들은 자손들, 자식들이 자주찾아오는 것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옛 어른들이 자식들의 ‘시시왕래’, ‘삭삭왕래’를 마냥 바라고만 있었을까? 아니다. 평상시 그러한 기준으로 재산을 분배한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시했고, 실제로 황씨 할머니처럼 죽을 즈음에 분재를 실시했던 것이다. 딸 아들 차별이 없던, 자식을 두지 않아도 양자를 하지 않던 시절에는 매우 보편적인 분재 방식이었다.

어르신 여러분! 오늘부터 자식들에게 말해 보세요. ‘자주 자주 내 집에 드나는 것’을 재산상속의 제일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아름답고 정다운 노후가 기다리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