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김우전 옹은 192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90평생 넘게 살아오면서 내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과 감사를 잊어본 적이 없다. 역사는 진실돼야 하고 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남겨야한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9살이 되던 해 남강 이승훈(민족대표 33인 중) 선생의 동상이 오산학교 교정에 세워진 것을 보며 위풍에 감동하고, 존경하고 흠모하며 애국심을 키웠다. 부친은 고읍역 시가지를 개척한 유지였다. 형은 일본으로 고학을 떠나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13살에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모시며 사방공사 일을 하다가 사법서사 사무소에 취직이 돼 일을 했다. 16살 되던 해 형이 돌아오자 일본 교토(동경)로 고학을 떠나면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일을 감당해 내는 투지를 배웠다. 조선일보 정주지 국장으로 있던 형이 항일언론인 애국사상범으로 정주경찰서에 구금돼 고초를 겪는 것을 보면서 선생의 민족의식과 애국심은 더욱 커지게 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배달하고, 아침밥을 지어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고, 축구부 연습을 하고,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밤늦도록 예습과 복습을 하는 “주경야독, 근면갱생”의 정신을 체득하는 교훈을 배웠다.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에 합격했으나 1944년 법정학부를 중퇴하게 됐고, 그 후 1996년 특별 졸업장을 받았다. 그 시절 애국지사 남창령 선생과 부친인 애국지사 남재호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 일생의 천행이었고,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하게 됐다. 한광반(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을 졸업하고, 광복군 연락장교로 근무하며, OSS무전훈련계획을 세워 한미공동작전협의에 동참하고 중경 임시정부에서도 수행해 무전훈련에 대한 중국군사위원회 승인을 확보하는 데 참여했다. 국내침투공작 사명을 띠고 김구주석 기요비서(機要秘書)로 임명됐다. 8.15광복 후 김구 주석 비서로 경교장에 근무하면서 1948년 평양 남북협상에도 수행했다. 김구 선생서거 후 직장생활과 병행해 사회단체 봉사생활을 했다. 김우전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2001년 국민훈장목련장이 수여됐다. 현재 성남의 의병장 동천 남상목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찾아가는 독립운동교실’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화연 기자 maekra@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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