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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을 추억하다(6) 상수도

  • 관리자 | 기사입력 2013/07/26 [13:57]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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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때를 아시나요?

‘수권번호 72호, 관리인 김○○, 요금 1지게 2원.’

빛바랜 사진 속 희미한 글자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왈순아지매 ‘만화방’이거나 눈깔사탕을 팔아도 좋을 ‘점방’ 앞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와 하의실종 패션으로 거리를 누비는 아이가 정겹다. 

그리고 그 한편에 놓인 상수도 한 장의 사진에 질곡한 세월의 노래가 흐른다. 저 아이, 눈길 한 번 손길 한 번 바라지 않고도 잘 자라 제 몫은 단단히 하고 있으리라.
 
1969년 이주 초기 12개의 공동 우물이 존재했으나 그 혜택 밖의 사람들은 계곡이나 냇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짐 부리듯 부려 놓은 사람들을 헤집고 죽죽 도로가 내리깔릴 즈음엔 상수도가 하나둘 놓이기 시작한다. 

어려운 시기에 수도를 선점한 가정에서는 물 한 지게에 2원씩 돈을 받고 팔았으니,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던 시절이다. 

양철통으로 물을 길어 먹었던 아낙은 “뒤뚱뒤뚱 물지게로 길어 온 물을 목욕물로 사용해 버린 시동생이 제일 미웠다”고 한다. 한 지게에 2원을 주고 사온 물인데 목욕을 했으니 미움이 서리기도 하겠다 싶다.
 
상수도는 들어왔지만 그 시절 생활상은 형편없었다. 영화에서 본 목욕탕 한 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 시민(남·54세·분당구 이매동)은 말한다.
 
“그때 버스비가 5원 정도 했으니 목욕비가 10원이나 20원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돈이 없어서 목욕은 못하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여러 놈이 목욕탕 환풍기를 통해 안을 들여다봤지요. 그런데 하필 여탕이었지 뭡니까? 먼저 본 놈은 달아나고 꼬바리(사투리)로 보다가 붙들려서 혼줄이 났지요.”

‘멱감기’나 ‘목간’에서 대중목욕탕으로 가는 과도기에 생긴 일화 한토막이 유쾌한 상상의 회화 한 점을 낳는다. 광주군 서가산 근처(현 이매동)가 집이었다는 그는 그날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성남시 수돗물은 1970년 하루 4톤 생산을 시작으로 1972년에는 1만5천 톤을 생산해 67.5%의 급수율을, 1976년에는 하루 2만5천 톤을 생산해 80%의 급수율을 보인다. 2012년 12월 31일 현재 보급률 99.9%로 1인 일일 급수량이 343리터다(성남시 맑은물관리사업소 급수현황표).
 
자료출처 : 디지털성남문화대전, 성남시맑은물관리사업소
박경희 기자 pkh223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