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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을 추억하다(7) 장 마 당

  • 관리자 | 기사입력 2013/08/22 [15:5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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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때를 아시나요?

사진

‘계통문’으로 정보를 교환하던 곳

“야~ 주환아, 너 그러면 안 돼. 임마! 음음~~”
취기에 아직 들이키지 못한 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놓고 취객은 이미 인사불성이다. 
장마당 한 귀퉁이 막걸리집 풍경에서 취객의 애환이 묻어난다.

이런저런 이유로 찾아오는 장마당, 사람으로 인해 마음 한 자락이 상한 날이면 괜스레 술을 핑계 삼아 소리라도 지르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법이다.

“지금이야 전화, 자동차가 통신을 대신하지만 옛날에는 장마당에나 나와야 위·아랫마을 소식을 접할 수 있었거든. ‘계통문’이라는 게 있었어. 그게 뭐냐면 ‘누구네 아들이 삼월 삼짇날 결혼을 한대’ 하는 내용을 국밥집 같은 곳에 두면 그걸 본 사람은 보았다는 표시로 요즘 말하는 댓글을 죽 다는 것이지. 장마당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고.”

물론 예전의 일이겠지만 ‘장마당’이 순기능 이상으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었음’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인간이 살기 시작한 곳이나 문명이 발달한 곳에는꼭 물이 있었듯이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곳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장마당이 열렸다. 

우리 성남지역에도 본시가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판교, 분당, 고등, 모란 등으로 대표되는 장들이 생겨났고, 기록에 의하면 18세기 중반부터 향토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 중 모란장은 아직까지 전통장의 모습을 잘 유지해 가는 도시 속 민속장으로 소박하면서 즐거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1960년대 수정구 수진2동에있는 모란예식장 주변을 중심으로 형성됐으며,1980년대 정기시장 상설화 정책에 따라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1990년 이후 중원구 성남동 현 자리로 이전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5일장으로 발전했다.

우시장이 존재했던 모란시장

아시나요? 천변, 뙤약볕 아래 장마당을 펼친 장꾼들의 일터 너머 어디쯤인가에 규모는 작아도 우시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소 두 마리를 몰고 가야 하는데, 아 요놈들이 그새 정분이 난 거야. 서로 엉겨 붙으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고. 그래, 어쩌겠어. 꾀를 냈지. 한 마리를 끌어다 50m 앞 전주에 묶고, 두 번째 소를 끌고 와 100m 앞 전주에 묶는 식으로 따로따로 끌고 갔지.”

사랑놀이의 방해꾼을 자처했던 10대 소년은 이제 50대 후반의 중년이 됐다. 과거 우시장이 있었던 모란시장은 현재 화훼와 양곡, 약초, 야채, 의류, 신발, 잡화, 생선, 애견, 가금 등 없는 것이 없다.

우리에게 장마당이란 어떤 곳일까? 생존의 치열한 싸움터를 넘어 녹슬지 않는 인심으로 설설 끓는 순댓국 한 그릇에 막걸리가 철철 넘쳤고, 닷새를 기다려 소식을 전해 오는 우체국 역할까지 치러낸 흔적이 보인다.

우리도 이따금 잠시 장마당에 들러 달콤한 추억의 자취를 찾아보면 어떨까? 좌판에 있는 십리사탕 하나라도 입에 물고서.


                                                                                                  자료출처 : 디지털성남문화대전
                                                                                            박경희 기자
pkh223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