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때를 아시나요?
권농일(勸農日)은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었던 때 농사를 권장하고 소득증대를 위해 1996년 권농일을 폐지하기 전까지 정부가 주관한 공식기념일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성남지역도 1970년 이전에는 거의 농지이거나 산이었기에 농사가 업인 사람들이 살았다.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 농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근본인 줄만 알고 살던 시절. “본시가지로 학교를 가면 유학 왔다고 놀렸을 정도로 이매동은 촌이었다”는 한 시민은 “부모님이 이매동(성남시농업기술센터 근처)에서 복숭아과수원을 하셨는데 이주 초기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이주민들이 애써 가꾼 복숭아를 밤에 자루를 들고 와 몰래 따 가버려서 가슴 아팠다”며 농부의 안타까웠던 때를 말한다. 남다른 소리꾼의 끼를 타고 났다는 50대 남자 분은 “농부자식이 소리하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어른들 눈을 피해 새몰이 한다는 핑계로 논으로 나가 목청껏 소리 연습을 하곤 했어. 닭이 알을 낳으면 목을 보호하기 위해 계란을 감추고 시치미를 떼었지. 그러면 할아버지께서 ‘알도 낳지 못하면서 낮에 우는 닭은 재수 없으니 그 놈의 닭 잡아 버려라’고 소리를 지르셨다”며 웃는다. 논밭은 이제 개발의 더께에 눌려 시민들의 자전거길, 산책로가 됐으며 농토를 비옥하게 했던 탄천은 빌딩 사이로 흐른다.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고새로운 풍경이 그림의 한 자락에 앉았다. 그 시절, 농부는 농사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두레 단위로 놀이를 즐겼다. 모내기 때나 추수를 마친 뒤 공동작업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춰 여러 가지 연희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결속을 다지기도 했다. 그 놀이와 노래가 우리 지역의 오리역 주변인 오리뜰 지역에서도 1960년대까지 전해져 왔다. 그 후 도시화가 진행되자 두레 농악을 놀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농악도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농악 전승자인 강승호 (사)한국농악보존협회 성남지회장은 “물 좋은 탄천 주변으로 먹을거리 따라 오리가 날아와서 ‘오리뜰’이라 했다. 그 들녘 구미리(안말, 벌말, 골안, 넘말…)에서 놀던 풍물을 ‘오리뜰 농악’이라 했고, 힘을 덜기 위해 부르던 농요를 ‘오리뜰 들노래’라 했다. 문화관광부에서 공모한 ‘전통예술 복원사업’으로 선정(2007년 농악, 2008년 들노래)돼 복원하게 됐다”고 한다. 그에게 재밌는 노랫가락 하나를 부탁했다. “물이 출렁 수답이요~♬ 물이 말라 건답이로세~♬ ~억대우 같은 소로다…” 선창을 하면 “하나로 구나~ 둘. 둘이로다~ 서이…” 하며 메기고 받는 가락이 구성지다. 그에게 청했던 노래는 귓가에 울리는데 나오는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다. “단원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 9월 8일 2013년 임방울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오리뜰 농악’이 준우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박경희 기자 pkh2234@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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