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성남무용단장 한국무용협회 성남시지부장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이수자 및 보존회 부회장인 김종해(62‧하대원동) 성남무용단 단장은 1982년 ‘난무회(蘭舞會)’를 창단, 초대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개칭된 ‘성남무용단’ 단장으로 향토무용 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전남 나주시 금천면 시골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광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주산실력이 남달랐던 선생은 광주동성중·광주상고를 주산 5단의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1년 동안 직장을 다니다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을 하겠다고 기차표 한 장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무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남자가 무슨 무용이냐”고 더 반대가 심했지만 한번 뜻을 세우니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74년을 서울에서 보내고 1975년 누님 댁으로 온 때부터 성남에 뿌리내려 살게 됐다. 선생이 하고 싶었던 것은 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극에 필요한 신체훈련을 위해 무용·창·발레 등을 배웠다. 연극에 가미하려 한국무용을 했던 것이 선생을 무용인으로 살게 한 운명적인 계기가 됐다. 1979년 2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한 그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시립무용단에 입단해 3년 동안 활동을 한다. 1981년 10월 결혼을 하고 82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해 13년을 활동하게 된다. 故 김선봉, 故 양소운, 故 윤 옥, 김기수 선생으로 부터 봉산탈춤을 사사했고 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이수자가 됐다. 1993년 경기도립무용단 단무장으로 3년을 재직했고, 1976년부터 1994년 정금란 선생이 타계하기까지 그분에게서 한국무용을 사사했다. 1997년부터 경기문화재단 예술부 전문위원(예술팀장)으로 10년을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9년 2월 용인대학교 대학원에서 <봉산탈춤의 현대적 전승방안 연구>논문으로 무용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70여 개국에 40여 회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며 국가 홍보사절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립무용단 시절 ‘도미부인’ 공연 후 2년 만에 모범단원상을 받았고, 1984년 LA올림픽 때 공연작품이 됐다. 제3회 전국무용제에서 ‘태(胎)’라는 작품으로 우수상에 이어, 민족성·자주성을 강조하는 작품 ‘외로운 섬 독도이야기’로 안무상‧미술상, 제10회 성남예술대상을 수상하는 등 빛나는 활동경력을 갖고 있다.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성불립(無誠不立)의 정신을 예술인으로서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온 선생은 성남문화원에서 한국민속춤(춤춤 무용단) 강사로 오늘도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한국무용을 전공한 단원들로 구성돼 한국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을 두루 공연하는 전문 프로 무용단의 수장으로서 차세대 젊은 안무가 양성을 위해 제16회 성남창작무용제를 9월 27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연다. 성남시민의 많은 호응을 기대한다며, 예술의 불모지였던 이곳 성남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다 타계한 정금란 선생의 맥을 잇기 위해 11월에 있을 ‘제12회 정금란 무용제’가 전국적 무용제가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화연 기자 maekra@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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