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4년 2월 23일 매매명문 © 비전성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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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임진왜란은 이른바 ‘미증유의 전란’으로 일찍이 없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순신, 권율과 같은 난세의 영웅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전쟁을 꿋꿋하게 견뎌낸 사람들이다. 여기, 그 숨은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광주에 기반을 두고 있는 평산 신씨 신잡(申磼, 1541~1609) 종가에 전하고 있는 고문서에는 임진왜란 중 사람들을 묘사한 기록이 있다. 평산 신씨는 왕실과도 인연을 맺으면서 이른바 벌열로 입지를 다지고 있던 명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란의 회오리를 피할 도리는 없었다. 신잡은 전란으로 인해 그의 동생을 모두 잃었다. 그 유명한 신립 장군은 1592년 4월 탄금대에서, 막냇동생 신할은 5월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급은 피난 중 왜군을 만나 어머니 대신 죽음을 택했다. 이처럼 전쟁은 지켜온 일상을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전쟁으로 어지러워진 뒤 집안의 재산은 없어지고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온 문서는 전부 잃어 버렸다. 부리던 노비들도 또한 모두 사망하였고, 다른 지역 전답과 노비들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어머니의 상을 마친 뒤에 살아남은 가족들은 한양과 지방에 흩어져있어 함께 모일 수가 없다.
- 임진왜란 직후 신잡(申磼)이 부모의 재산을 나누는 분재기에 쓴 서문 중에서
신잡은 전쟁 통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상도 치러야 하는 망극한 상황에 직면했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재산이 흩어졌다는 점이었다. 피난 중에 재산 소유를 증명해 줄 땅문서, 노비문서를 잃어버렸고, 전란이 끝나고 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가족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졌다. 평산 신씨와 같은 유력 양반조차도 전란에서 일상이 무너졌으니 일반 백성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왜란 중에 작성된 매매문서에는 전란 당시 절박했던 사정들이 언급되어 있다. ‘난리로 생계가 아주 군색하고 홀로 계신 어머니와 동생을 봉양할 길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처분하는 사연이 곳곳에 확인된다. 이러한 물질적인 고통보다 심한 것은 마음의 상처였다.
임진년 분탕질이 있은 뒤 집안의 토지가 모두 무너져 전혀 의지 할 것이 없다. 걸식해서 살고 있어 곧 굶어 죽을 것 같기 때문에 종을 판다. 전란을 겪으면서 나의 몫이었던 집안의 전지를 완전히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장마저도 잃어버려 새로 만들어 갖출 수 없다. 이 문서에 손바닥을 그리니 이로서 나중에 상고하고자 한다.
-1594년 2월 23일 매매명문 중에서
안동 권씨 부인이 남자 종을 팔 때 작성한 매매명문의 내용 중 일부이다. 그녀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남겨진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 통에 집안 노비들은 도망가고 땅도 경작을 못해서 황폐화됐다. 모든 재산이 무너져 내리자 급기야 가족들과 걸식하면서 굶어 죽을 처지가 됐다.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시련은 사대부 아녀자로서의 품위를 지켜 주는 도장을 난리로 잃어버린 것이다. 어쩔수 없이 그녀는 평민이나 천민이 매매할 때 이용하는 손바닥을 문서에 찍는 행위를 해야 했다. 아마도 그녀는 간절하게 일상의 평화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명문가 양반이라 해도 임진왜란으로 인한 일상이 파괴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가족과의 생이별은 현실이고 흩어진 재산은 다가올 두려움이었다. 이처럼 전쟁은 일상이 가져다주는 평화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