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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영조와 술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8/10/23 [15:1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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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조상의 제사상에 반드시 올려야 하는 가장 경건한 음식이면서 또 멀쩡한 사람을 한 순간에 주폭으로 만드는 광약(狂藥)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사정은 지금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장서각에는 영조의 명을 받아 간행한 《어제경민음》이란 책이 있다. 영조가 편찬한 책이 모두 한문본이거나 한문을 번역한 책인데 반해 《어제경민음》은 처음부터 한글로 작성된 책이다.
 
영조가 하는 말을 그대로 헌관이 한글로 받아 적은 책이니 영조의 육성이 가장 잘 살아 있는 책이라고 할수 있다. 영조가 이렇게 모든 백성이 다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이 책을 간행한 이유는 그만큼 백성들에게 꼭 전해야 하는, 그것도 아주 다급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술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 “술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진실로 광약(狂藥)이다”라고 했고, “술은 맑은 기질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기질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영조실록, 권10, 2년(1726)10월 13일>

술의 폐해를 절감하고 있던 영조가 금주령을 엄격하게 추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종묘 제사 때문이었다. 종묘 제사에는 술을 쓰면서 백성들에게 술을 못쓰게 할 수는 없었다. 이에 영조는 즉위 후 30년 동안 금주 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영조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사에 예주(醴酒)를 대신 쓸 것을 생각해냈다. 예주는 감주(甘酒), 즉 단술이었다. 예주는 그 당시 먹고 있던 술인 시주(時酒)의 조상이니 제사의 강신(降神)에 예주를 쓸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 9월 10일>
 
제사에서의 술 문제를 해결한 영조는 드디어 1756년(영조 32년) 모든 제사에서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는 금주령을 공포했다. 금주령 위반자는 엄형(嚴刑)으로 다스렸다. 술을 마신 자는 노비로 소속시키고, 선비는 청금(靑衿)에서 삭제한다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부과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술을 쉽게 끊지 못한 모양이다. 급기야 1762년(영조38년) 9월 4일에 위반자를 사형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다. 장서각에 소장된《어제경민음》은 금주령 위반자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한 후에 반포한 것으로 영조가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내린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영조는 사랑하는 백성들을 목을 매달면서까지 결단코 술을 없애는 것이 진정 조종과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심하다 술이며 심하다 술이여. 백성이 종 되기를 돌아보지 않고 형장에 머리달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 어떤 마음이며 그 어떤 마음인가. 이를 끝까지 금하지 못하면 다른 날 조종께 절할 낯이 없고 오늘 백성을 살게 할 도리가 없으므로 이같이 여러 번 말한다.”<어제경민음>
 
영조는 금주령을 어긴 백성이 형장에서 처형당할 때 부모 형제가 겪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부디 금주령을 지켜줄 것을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모든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세 번 회시(回示)할 때 부모 형제는 발을 굴러 부르짖고 높은 대에 머리를 달아맨 후에는 반드시 소리를 참고 땅에 엎어질 것이다.… 오호라 희미한 달과 흐린 구름이 쓸쓸한 바람에 소슬할 때 정형을 받아 죽은 넋은 제 부모와 처자를 부르며 내 어찌 금주령을 범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어제경민음>

이 글을 읽은 백성들은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차마 입에 술을 대기는 힘들었을것이다. 영조는 조선에서 술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이 마음을 결코 누그러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결심했지만 이 무시무시한 금주령은 시행한 지 12년만인 1767년(영조 43년) 1월에 폐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