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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 70주년, 되새겨보는 성남의 항일 선열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5/07/22 [16:4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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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생대공원에 위치한 성남항일의병 기념탑     © 비전성남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주권을 빼앗긴 우리나라는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선조들은 한반도 안팎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본과 맞서 싸웠고 성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부지런히 살라’ 하신 윤치장 의병장!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계기가 돼 일어난 1차 의병항쟁에서 남한산성은 광주와 이천 등 경기지방 의병활동의 거점이었다.
광주군 대왕면 금토리에서 태어난 윤치장(1876~1971)은 헤이그 밀사파견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고군대가 해산되자, 과천·대왕·낙생·언주(현 강남구) 일대의 의병들을 규합해 광주군 묵동에 주둔한 일본 기병대와 약 1년 동안 싸웠다.
1908년 2월, 윤치장은 중군장 오사과(吳司果) 외 2명으로 하여금 언주에 사는 박승호에게 군자금을 받아내고, 그를 설득해 의병에 입대하게 했다. 또한 박승호에게 경성에서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명한 윤치장은 허위·이강년 등과 합세해 경성공격을 준비하던 중 미아리고개 부근에서 의형제의 밀고로 체포됐다.
1923년 석방된 윤치장은 독립운동에 전념했고, 사망 후에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동시다발적으로 만세운동을일으킨 독립운동가 한백봉’
1919년 성남의 만세시위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대왕면의 이시종은 19세의 나이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돌마면 율리의 한백봉(1881~1950)은 면내의 유지들과 시위운동을 모의, 낙생면의 남태희와 연계해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한백봉은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소식을 듣고 상경했다가 손병희·한용운· 권병덕 등을 만나 만세운동에 찬동,3월 26일 주민들을 모아 율리 뒷산모란봉에서 만세시위를 예고하는 봉화를 올렸다.
3월 27일 분당리 장터에 군중이 운집하자 한백봉은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판교리에서 남태희가 주도한 시위민중들과 합세했다. 시위대는 백현리·운중리·궁내리 주민들로 3천여 명에 달했다. 또 현재 태평동·수진동 일대의 주민 300여 명은 남한산성 내 면사무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체포된 한백봉은 최종 3년 6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영친왕 국혼 특사로13개월 만에 사면됐다. 출옥 후 1927년 한순회·이대헌 등과 농민운동을 전개하고 신간회 광주지회를 결성, 간사를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90년 8월 15일 정부는 한백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광복회 이용위 회장
광복 70주년이 남다른 성남시광복회이용위 회장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의 뜻이 헛되지 않
게 몸과 마음을 일깨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세워야 진정한 광복”이라고 한다. 매년 8월 15일에 성
남시광복회는 애국애족의 뜻을 담은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준다. 올해는 야탑 광장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성남에서 활동한 항일 운동가는 다수에 이른다. 그분들과 함께 싸운 무명의 주민들도 수없이 많다. 광복
70주년, 우리는 그분들의 헌신을 되새기고 잊지 말아야겠다.

참고자료: <성남인물지>, <내 고장 성남>, <돌마 마을지(下)>
조여일 기자
dudlfd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