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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남 역사 이야기 (11)

  • 관리자 | 기사입력 2009/11/24 [21:49]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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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생(樂生)지역의 문화유산

서울 가는 사신들이 쉬어 가던 낙생역
서판교 지역은 옛 광주 낙생(樂生)인데 영락장생(榮樂長生)의 땅이다. 고구려와 백제시대의 무덤과 구석기 문화유적이 발굴돼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한 역사가 확인됐다. 그리고 낙생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꼭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고려 말에 이곡(李穀)이 <청풍정기(淸風亭記)>에서 낙생역에 머물렀다고 한 기록을 비롯해 훗날 왜(倭)나 동남아시아 사신들이 서울로 가는 길에 낙생역에서 쉬어 갔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여러 가지 문화유산이 있다.
이 지역 문화유산 가운데 안타깝게도 사라져 버린 문화유산으로 낙생행궁(樂生行宮)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 역대 임금이 성남지역에서 군사훈련 강무(講武)를 실시할 때나, 청계산과 문현산 등지에서 사냥을 하고 머문 곳이었다. 수만 명의 군사를 사열하고 임금은 탄천  주변이나 낙생역 앞 들판, 낙생행궁에서 머물기도 했다. 세종임금은 온천에 갈 때에도 이곳을 지나다가 낙생에서 머물렀다.

궁내동의 전주이씨 인물들의 묘소 <정희사>
낙생 지역에는 저명한 역사 인물들의 묘소를 통해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궁내동(산 17-1번지)에는 전주이씨 인물들의 묘소와 사당 <정희사(靖僖祠)>가 있다. 조선 중종의 왕자인 덕양군 이기(德陽君李岐)는 이복형제인 인종.명종과 우애가 돈독했고, 종부시 도제조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시호는 정희(靖僖)다. 아들인 풍산군 이종린(豊山君 李宗鱗) 묘역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됐다. 구천군 이수의 호종훈(扈從勳,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해 따르던 일 또는 그런 사람의 훈공)으로 현록대부(조선시대, 정일품 종친(宗親)의 품계)에 추증됐다.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이 지은 충숙공 이수 묘갈명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왕실에 경사가 연이어(天潢衍慶) / 현철이 태어났네(式生賢哲) / 풍산군의 바른 행실(豊山飭行) 가업의 기반 되었으니(以基家業) / 공이 드디어 생겨나서(公遂胚胎) / 가문을 더 빛내려 했네(將多前烈)

충숙공 이수, 정1품 현록대부에 오름
충숙공 이수(李睟, 1569~1645) 선생은 이종린의 아들이다. 인품이 준수하고 두각을 나타내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사람들이 알았다. 임진왜란 때 의분에 찬 목소리로 형 구성군에게 “이 아우는 어버이 때문에 이 어려운 시기에 호가(扈駕,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뒤따르던 일)를 못했는데, 형님이 집안일을 맡아 주시면 저는 서쪽으로 가겠습니다” 하고는, 곧 몸을 빼어 달려갔다. 그리하여 왕명을 받들고 다시 분조(分朝)로 간 다음 곧바로 선전관이 됐는데, 그 역시 남다른 대우였다. 묘소는 경기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됐다. 
1615년 역적 이이첨이 광해군의 비위를 맞추어 놀아나면서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母后)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을 때 공은 이를 통탄해 항의하는 상소를 올려 이이첨의 죄를 논했다가 순천(順天)으로 유배돼 4년 후에야 풀려났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태연한 마음으로 시와 술을 벗 삼아 즐겼는데, 전후의 수재(守宰, 수령)들도 다 존경하며 예우했고, 그 고을 백성들까지도 모두 감탄했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을 공주로 모시고 갔다. 이때 사람들에게 “이괄의 관상이 흉해서 오래지 않아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곧 그 말대로 돼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 난이 평정된 후, 임금이 사석에서 그를 만나면 언제나 직접 술잔을 들어 권하면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종친 호칭을 썼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도 국왕을 강화로 모시니, 죽은 뒤 정1품 벼슬에만 주는 현록대부(顯錄大夫)에 올랐다.
그가 세상을 뜨니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 죽었다고 애석해 했으며, 아래에 있는 벼슬아치들까지도 모두 한숨을 짓거나 눈물 흘리며 곡전(哭奠) 드리기에 바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호탕해 법도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자라면서 학문을 좋아해 쉴 새 없이 노력했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일 즐기기를 맛있는 음식을 즐기듯 했다. 그는 남이 못할 일을 많이 했는데, 그의 본바탕이 아름다운 탓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배움의 힘을 속일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다.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
정리 : 윤종준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