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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이야기/ 연일정씨 일가의 복된 우물과 정수장

  • 관리자 | 기사입력 2010/02/23 [17:20]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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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 혹은 살고 있는 곳의 역사다. 

성남시의 많은 동(洞) 가운데 복정동은 서울과 가장 인접한 곳으로 성남지역의 첫 관문이다. 조선시대 때 광주군 세촌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복우물, 가마절, 기와골, 안골, 응달말 등을 병합해 ‘복정리’라 명했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복정동이 됐다. 복정동은 영장산 서쪽과 북쪽 기슭에 형성된 마을로 고려 말기에 건립된 망경암과 안골의 느티나무, 복정동의 기원 설화인 ‘복우물’이 이목을 끈다. 

조선시대 중기, 평안도 안주 목사를 지낸 ‘정호’라는 사람이 1490년경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  그 후 연일정씨 5대에 걸쳐 유복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집 안의 우물이 ‘복이 많은 사람 집 우물’로 복우물(福井)이라 부르게 됐다. 

정호의 후손 공조참판 정립의 부인 남양홍씨는 길쌈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후사를 잇지 못하는 시름을 달래기 위해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명주실을 뽑아 비단을 짰다. 홍씨가 짠 비단을 정립은 동료와 대신들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했는데 비단을 받은 사람들이 보답으로 부인에게 장식용 금베틀과 은베틀 한쌍을 선물했다. 부부는 이것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해평윤씨 윤경지에게 외동딸을 시집보낸 정립은  1629년 56세에 중풍으로 생을 마쳤다.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고 정립의 부인 홍씨도 금베틀과 은베틀을 우물 속에 묻고 하인들과 피난을 떠났다. 피난 중에 홍씨가 죽자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집을 지키던 하인이 베틀을 파내려하자 천둥과 번개가 몰아쳤다는 전설이 있다. 1950년대 초까지도 베틀을 찾기 위해 탐색했으나 실패했다. 
 
복우물은 현 정수장 뒤에서 안골로 가는 506번지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 비록 우물은 사라졌지만 복된 우물 자리에 성남시민이 먹는 정수장이 들어서 복우물 역할을 하고 있다. 안골 깊숙이 들어가면 수령이 8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망경암의 200년 된 느티나무와 함께 성남시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다. 두 노거수는 복정동의 변화하는 모습을 오랜 세월 굽어보고 지켜보며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현재 복정동엔 서울이 한눈에 보인다는 망경암을 비롯해 연일정씨 묘 등 많은 문화유적과 생활시설인 정수장과 하수처리장도 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먹는 것과 배출하는 곳이 있는 복정동이야말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장 복된 곳이 아닐까.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
참고자료 / 성남문화원 마을지 
도움말 / 윤종준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