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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조선시대 전염병과 사회적 거리두기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0/04/28 [15:4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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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중국에서 시작된 전염병인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인 재난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항생물질의 개발이나 예방 백신의 개발 등 의학의 발달이 영양과 위생 개선과 함께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한때는 우리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종 전염병은 꾸준히 발생해왔고, 그중 몇몇은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

『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전염병을 의미하는 한자 ‘역(疫)’을 ‘백성들이 모두 앓는 것[民皆疾也]’이라고 풀이한다. 『석명(釋名)』에서는 ‘역(疫)은 역(役)이다.’라고 해 요역(徭役)과 같은 집단적 부역과 연관짓기도 한다.

대규모 요역의 경우 전국의 다양한 곳에서 사람들이 모였고, 부실한 영양과 위생상태 속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하게 됨으로써 전염병의 발발과 전파가 급속도로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들이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그 전파가 지역을 넘어가며 확장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코로나19의 범지구적 전파와 대규모 인명 피해를 초래한 배경이 된 것은 인구의 증가와 도시화, 그리고 교통의 발달과 세계화일 것이다. 현대화된 사회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치료약과 백신이 없는, 전염성이 강한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대두된 일상의 변화가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다.
 
▲ 조극선의 일기,『 인재일록(忍齋日錄)』과『 야곡일록(冶谷日錄)』     © 비전성남
 
‘사회적 거리두기’는 새로운 것은 아니며, 전염병을 대처하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일상의 많은 활동을 자제하며 사람들간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조극선(趙克善1595~1658)의 일기인 『인재일록(忍齋日錄)』에도 이와 관련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621년(광해군13)에서 이듬해 초까지의 기간에 극선일가가 거주하는 덕산현(현 충청남도 예산) 일대에는 홍역 등 전염병이 잇달아 창궐했다.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있던 조극선 일가는 전염병을 피해 다른곳으로 옮겨 10개월이나 거주했다. 그리고 많은 활동을 줄여나갔는데, 여기에는 심지어 제사와 아버지의 생신과 같은 중차대한 일도 포함됐다.
 
이 시간을 지나면서 조극선 일가는 노비를 포함해 7명의 식솔을 잃었고, 말도 3마리나 죽어나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1년이 넘도록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엄혹한 전염병의 시절을 견뎌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전염병을 대처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 역시 1556년(명종11) 봄에서 여름 사이에 홍역이 퍼지자, 할아버지가 쓴 손자 육아일기 『 양아록(養兒錄)』에 ‘크게는 제사를 멈추고 작은 일로는 길쌈을 그만두었다’고 기록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가운데 홍역은 2~3개월 만에 사그라졌고, 다행히도 이문건 일가는 병마를 이겨 낼 수 있었다. 어린 종으로부터 시작해 2대 독자인 친손자를 비롯한 일가 8명이 홍역에 걸렸지만다행히도 모두 건강해졌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코로나19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으며,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여전히 암흑속을 헤매고 있다. 어려운 시기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여전히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