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광주대단지사건을 기록하다

1971년 8월 10일, 전성재 어르신이 전하는 비 오는 날의 기억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0/10/23 [14:29]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01, 02 난민캠프보다 열악했던 광주대단지 03 서울로 항의 시위를 떠나는 사람들     © 비전성남

 
‘드디어 내 집을 장만할 수 있구나!’. 서울 빈민가의 판잣집 신세를 벗어나 ‘드디어 내 집이란 게 생기는구나’란 희망을 안고 온 사람들에게 줄 하나 그어 놓은 맨땅, 던져진 군용텐트는 무허가 판잣집의 삶보다 더한 처참함이었다. 그곳엔 일자리가 돼줄 공장도 없었고, 상가도 없었다. 취업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있는 교통수단 또한 형편없었다.
 
전성재(83·금광2동) 어르신이 강원도 평창, 고향을 떠나 처자식과 함께 성남에 터를 잡은 것은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딱지(분양권)를 받고 서울 청계천 등에서 온 사람들 중 대부분이 딱지를 팔고 대단지를 떠난 후였다. 터를 잡고 보니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현 태평동), 영창대군 묘지 앞이었다. 환경의 열악함도 모른 채 “광주대단지에 가서 두부를 만들어 팔면 좋을 것”이라는 속임수에 넘어가 20평 분양권을 평당 8천 원에 구입해 집을 지었다. 하지만 지대가 높다 보니 펌프로 끌어올리는 물은 두부를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어르신은 “나는 형편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당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은 처참했다. 물이 부족해서 두부 장사를 접고 지인의 소개로 한전 성남출장소에 취직해 전기요금을 수금하러 다녔는데 전기세를 못 내는 집이 수두룩했다. 전기세가 많이 밀리면 전기를 차단했고, 차단기를 떼가는데도 아무 말 못하고 차단기를 내줬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전기가 끊기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살 수밖에 없는 형편. 오죽하면 시장에서 팔다 버린 채소를 주워다 허기를 채우는 사람들도 있었을까. 어린 자식 입에 무엇으로건 풀칠이라도 해줘야겠기에 이집 저집을 배회하며 구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며 사람들의 고단했던 생활을 전했다.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던 날은 비가 내렸어요. 성남출장소로 가는 고갯마루에 경찰서가 있었는데 경찰서에 불을 지르려는 사람들과 경찰이 맞붙어 몸싸움을 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성남출장소로, 수진리 방향으로 몰려갔어요. 경찰차가 불에 타고, 자동차가 뒤집히고…. 전쟁과 같은 분위기였어요. 현재 수정구보건소 자리 근처에 을지로5가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데모대가 버스를 탈취해서 버스 지붕 위까지 올라타고는 나타나지 않는 양택식 서울시장 만나러 간다며 출발하는 걸 지켜봤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전성재 어르신은 “당시 상황에서 데모 군중이 무조건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죽하면 저럴까, 상황이 이토록 악화된 이유를 들자면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이주시킬 당시 약속했던 토지분양가와 납부 시기, 기본적인 생계대책 등을 어긴 정부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과 함께 “사람 살기에 참 어렵고 처참하고 험난한 시절이었습니다”라고 성남의 1971년을 회고한다.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
 
※ 1960년대 말~70년대 초 성남시에 거주했거나 광주대단지(성남시)를 기억하고 계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비전성남 편집실 031-729-2076~8
이메일  sn997@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