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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바람과 물이 어울리는 숲, 말림갓 가꾸기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3/23 [15:30]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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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0세기 갓뒤마을(지북동) 동계의 운영실상을 담고 있는 고문서     © 비전성남

 

▲ 1798년(정조 22) 경주 전경 그림 중 북쪽 끝에 묘사한 숲으로 어우러진 갓뒤마을 모습(『집경전구기도첩』,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 비전성남


4월 5일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나무 심는 날, 식목일이다. 1949년 식목일을 지정하고 그로부터 30년 동안 정부와 국민은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푸른 산과 들을 가꿨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녹화사업 모범국으로, 나무심기에 있어 인류에 기여한 업적을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나무를 심고 가꿀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해진다.
 
여기 조선시대 경상도 경주의 어느 마을에서 300년 가까이 나무와 숲을 가꾼 이야기가 있다. 경주 시내에는 큼지막한 숲이 있는데, 숲을 품고 조성한 황성공원은 시민들의 쉼터다. 이 숲 인근에 갓뒤마을로 알려진 지북동(枝北洞)이 있다. 17세기 초에 형성되기 시작한 이 마을은 일찍이 주민 결속을 위한 동계(洞契)가 조직돼 있었다. 그러다가 1730년(영조6) 보호림, 즉 말림갓을 가꾸기 위한 마을 사람들 사이의 결의가 성대하게 이뤄졌다.

마을 북쪽 빈터가 허전하여 우리 마을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진작부터 나무를 심어 이 빈터를 보완하고자 했다. 그런데 나무심을 땅에 주인이 있어서 망설이다가 바야흐로 마을의 의견을 모아 땅을 사고 나무를 심게 되었다. 아주 다행이다(1730년 『지북동 동중절목』 중에서).

갓뒤마을 주민들은 마을 북쪽에 평원지대가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이 아니었기에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나무를 심고자 했지만 기금조성과 토지 확보 문제로 연기되다가1730년 정월 25일 결행할 수 있었다. 숲을 조성할 때 모습은 아마도 아래와 같았다고 예측할 수 있다.

일 할 때 새벽부터 모두가 점심을 준비하고 소쿠리, 지게, 삽 등을 가지고 공사하는 곳에 모여 인원 점검을 실시한다. 재료를 운반할 때에는 소와 말을 동원하고 밭을 갈 때에는 함께 일을 한다. 주민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대비한다(1725년 『지북동 동중절목』 중에서).
 
숲을 만들기 5년 전에 마련한 동계 규약의 일부이다. 내용은 300년 전의 모습이라고 보기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며, 마을 일을 할 때 협동을 우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단순히 빈터가 허전해서 숲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였을까? 기록은 풍수(風水)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사(地師)의 권고가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풍수는 말 그대로 풍수해(風水害)를 의미했다. 황성공원 숲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강의 범람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마을 북쪽에 펼쳐진 들로 인해 강한 계절풍이 표토층을 날려버려 농업에 한계가 있고 겨울철 주거에도 불편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풍수해에 대한 방지를 위해서는 바람과 물이 어울리는 숲을 조성해야 했다. 그렇기에 갓뒤 마을은 마을 주민의 호혜를 위한 보호림, 즉 말림갓이 필요했다. 그리고 18세기 동안 17회에 걸쳐 말림갓 훼손 방지를 위한 결의가 있었고, 20세기까지 약속은 이어졌다.

경주 갓뒤마을은 풍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람과 물이 어울리는 보호림, 즉 말림갓이라는 공유자산(Commons)을 가꾸었다. 이처럼 우리는 일찍이 숲이 주는 혜택을 함께 즐기는 호혜(Reciprocity)를 위해 협동하는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기에 1970년대 숲 조성의 놀라운 성취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호혜를 향한 협동(Cooperation)의 유별난 DNA가 있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인류에 기여하는 지식 발굴을 위해 계와 관련 있는 고문서 제보를 항상 기다리고 있다.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비전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