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추억을 소환하다] 동네 사랑방으로 맵고 달고 고소한 세상사 볶고·빻고·나른다

세월이 지나도 손님이 기억하는 오복기름집 ·고추방앗간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5/24 [09:36]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 오복기름집․고추방앗간 외관     ©비전성남

 

맵지만 단맛이 나는 고추, 아주 작지만 한곳에 모여 고소함을 퍼뜨리는 깨. 이 두가지 식재료는 오복기름집․고추방앗간(상대원3동)에서 새로운 모습과 맛으로 소비자와 만난다.

 

가게에 들어서자 깨 볶는 냄새가 가득하다. 이은규(80)·한세정(74) 사장 내외는 깨를 씻어 볶고 착유기에 넣어 기름을 짜 기름병에 담는다. 사장 부부가 서로 일을 찾아 척척 손을 맞췄다. 쉼은 없는데 바빠 보이지 않는 모습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과거의 도시 풍경도 그랬다. 길가의 돗자리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빨간 고추가 파란 하늘을 붉게 물들일 것처럼 널려 있었다.

 

가을이면 옥상, 처마 밑에 고추를 널고, 비라도 맞을세라 신경 쓰며 말린 고추를 깨끗이 닦아 방앗간에서 빻아 오면 연중행사 중 큰일 하나는 마치는 거였다. 그 고춧가루로 김장도 하고 일 년 내내 맛을 내는 데 쓰였다.

 

그때는 동네에서 고추방앗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말리는 사람도, 고추방앗간도 보기 어렵다. 고춧가루를 주문해서 먹는 사람들이 늘면서 동네 고추방앗간 자리에는 다른 가게가 자리를 잡았다.

 

고추를 빻기 위해 기계에 넣자 매운 기운이 올라왔다. 고추를 썰고 씨를 분리한 뒤 고무 대야에 받은 고춧가루를 기계에 넣고 다시 빻기를 여러 번, 뭉친 고춧가루를 풀고 고춧가루에 남아 있을 씨앗을 걸러내니 붉고 고운 고춧가루가 됐다.

 

▲ 곱게 빻아지는 고추     ©비전성남

 

방앗간 사장 부부가 전하는 꿀팁

“들기름은 냉장 보관하는 게 좋아요. 냉동 보관하면 더 좋죠. 참기름에 비해 들기름은 유효기간이짧아요.” 기름 보관 알짜 정보를 가르쳐 준다.

 

“냉장고가 없을 때 우리 조상들은 기름을 소금단지에 보관했다”는 옛날이야기에 이어 “태양초는 마른 고추를 갈라보면 씨가 황금색이고, 기계로 말리면 씨가 갈색이다. 고추장용 고춧가루는 7~8회, 김치용 고춧가루는 5회 정도 빻는데, 태양초는 씨의 색깔뿐만 아니라 꼭지의 색도 다르다”는 정보도 건네준다.

 

고추가 풍년이면 그해 방앗간은 덩달아 바쁘다

오복 방앗간 부부는 1970년대 시에서 건축한 새마을주택을 분양받아 성남에 자리 잡았다. 남편 이은규 씨는 직장에 다니고 아내 한세정 씨는 식당일을 하다가 방앗간 일을 시작했다.

 

가게 아래에는 공동 수도가 있어 물을 길어다 써야 하는 시절이었다.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명절과 부모님 제삿날 외에는 쉬는 날이 없다고 한다.

 

먼 곳에서 고춧가루와 참기름, 들기름을 사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고추를 말리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가을은 바쁜 계절이다. 그해 가을, 고추가 풍년이면 방앗간은 덩달아 바쁘다. 여름에 수확한다는 참깨, 가을에 수확이 이뤄진다는 들깨까지 풍년이면 방앗간은 여름에서 그해 겨울까지 호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옛일이다. 마트에 가면 고추도, 참기름·들기름도 다 구입할 수 있으니 방앗간은 호황인 계절이어도 옛날만큼은 못하다.

 

▲ 빻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야 고운 고춧가루가 된다 / 참기름 착유 중인 이은규 사장 / 오복기름집 유리창에 쓰여진 글씨     ©비전성남

 

“밥도 금방 해 먹어야 맛있지, 찬밥 먹으면 어디 맛이 있더냐”

부부 사장은 “갓 짜낸 고소한 참기름과 들기름, 단맛 나는 매운고춧가루를 찾아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기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사장 부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금이 옛날이 되는 그때까지 맵고 단 고추 내음과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한 방앗간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을 듯한 풍경 하나가 그려진다.

 

▲ 방앗간 사장 부부     ©비전성남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 

취재 박인경 기자  ikpark9420@hanmail.net 

 

※ 이 지면은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성남의 모습을 시민과 함께 추억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주변에 30년 이상 오래된 이색가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착한가게, 장인 등이 있으면 비전성남 편집실로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31-729-20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