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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건식 성남시재향군인회장에게 들어본 광주대단지 그리고 성남

성남에서 물건 사기, 성남 택시 타기, 성남에 들어가서 밥 먹기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7/23 [11:47]

▲ 성남시 발전을 위한 서울공항 명칭 변경 및 고도제한 완화를 위한 궐기대회   ©비전성남

 

▲ 1973년 푸른성남 가꾸기 범시민 걷기운동     ©비전성남

 

▲ 88올림픽 성화봉송이 있던 종합운동장 근처     ©비전성남

 

당시 지명은 광주군 성남출장소. 성남시재향군인회 우건식(78) 회장이 성남에 들어온 건 1970년 3월, 우건식 회장의 나이 20대 후반이었다.

 

“광주출장소 모처에 파견 근무차 들어왔다”는 우 회장의 기억 속엔 광주대단지 시절의 고단함과 성남시 승격이 가져온 희망, 새롭게 시작된 터 일구기에 애쓰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재 수진2동 행정복지센터 자리에 헌병대가 있었어요. 그 옆에 있는 빨간색 기와집에 세 들어 왔어요.”

 

당시 빨간색 기와는 부의 상징이었다. 우 회장의 형편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가난은 없었다. 이삿짐이라고 볼 수 없는 허접한 물건들이 질척이는 땅바닥 위에 나뒹굴고, 주위를 둘러보면 가난과 고단함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그로 인해 솟구치던 성냄과 원성은 머지않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우 회장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1971년 8‧10 성남(광주대단지)민권운동 “봇물이 터졌구나, 당연히 올 게 온 거야.”

 

한밤중 트럭에 실려 와 내려진 짐짝들이 널브러진 언덕배기에 천막을 치던 사람들, 식수공급차에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분노가 생존 전쟁으로 터져 나왔다. 생계수단이 전무하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함께 약속과 다른 고액 분양가, 정부의 세금 납부 강요에 대한 울부짖음이었다.

 

성난 민심은 파출소와 경찰차에 불을 지르고 “먹고 살게만 해달라!”며 각목을 들고 정부를 규탄했다. 그 후 정부에서는 난동 또는 폭동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우 회장의 눈에는 민중의 소리로 보였다. 불모지에 쓰레기처럼 갖다 버려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1973년 7월 1일, 그들의 함성은 성남시 승격으로 이어졌다.

 

선거 때 식수 배급해주는 후보가 제일 좋은 사람이라생각할 만큼 여전히 식수 시설이나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성남시는, 전국 팔도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해서 ‘팔도 합중시’로 불리기도 했지만 시 승격 후 시민들의 주체의식은 강해졌다.

 

새로운 도시에는 피워낼 수 있는 꿈과 희망이 있었다. 서울 다녀오는 길엔 기다려서라도 성남 택시 타기, 성남에 들어가서 밥 먹기, 성남에 있는 상가에서 물건 사기 등 시민들은 지역 발전을 위해 마음을 보탰다.

 

▲ 성남시재향군인회 우건식 회장     ©비전성남

 

1978년 5‧4조치… 도로, 집 등 전면 개발제한 조치

 

새로운 도시가 형성됐지만 상황은 여전했다. 무분별하게 지어지는 주택, 정비되지 않은 기반시설로 인해 도시는 여전히 허름했고 시민들의 삶 또한 피폐했다. 그래서 내려진 5‧4조치는 ‘도시를 도시답게, 도시계획을 새롭게 한다’란 명목으로 모든 걸 제한했다.

 

우 회장은 “새로운 도시계획 발표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 풍경은 단대천 따라 금광동 방향으로 길게 지어진 비둘기집이다. 열 평 남짓한 공간에 벽돌 쌓고 지붕만 올려서 분양했다. 평수도, 모양도 똑같은 열 평 남짓한 집이 단대천 따라 길게 늘어서 있어 비둘기집이 연상됐다”고 말한다.

 

우 회장은 “어렵고 힘든 광주대단지에서 시작해 성남시민으로 50년을 살았다. 내가 살아온 성남시가 고마워 밥값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으로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며 살기 좋은 성남으로 일궈온 사람들을 향해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덕입니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준 공직 신분에 30대 초반, 일찍부터 사회공헌 활동에 참여했다는 우 회장으로부터 듣는 성남엔 가난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땀방울이, 가난 위에 지어진 시대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