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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정조의 치제문(致祭文)을 통한 통치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07/23 [10:42]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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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을 제향하는 여주 대로사(大老祠)에 보낸 치제문     ©비전성남

 

만기(萬機). 조선시대 국왕의 모든 활동은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행위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개인적 정회를 표현한 문학 역시 넓게 보면 국왕의 통치행위에 포함되는 의도된 행위였다. 왕실인물, 대신, 국가에 큰 공적을 남긴 신하에게 제물이나 제문을 보내 제사지내는 치제(致祭)는 국가의례로서의 공적 성격과 개인의 정회가 드러나기 때문에 국왕의 통치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의 중흥을 이끈 정조는 개인적으로도 문학, 서예, 학술 등에 뛰어났던 국왕이었다. 많은 시문을 지었지만 유독 다른 국왕에 비해 치제문을 많이 남겼다.

 

『홍재전서』에 실린 정조의 치제문은 모두 430편으로, 숙종 10편, 영조 140편에 비해 매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왕실인물이나 대신에 국한됐던 이전의 국왕에 비해 선현(先賢), 관료, 서원 배향인물 등 다양한 인물에게 치제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정조가 치제문을 지은 논리는 무엇인가? 정조는 ‘사현(祀賢)’, 곧 선현을 제사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사현은 『예기』 「제의(祭義)」의 말이다. ‘제후에게 덕을 존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지만 정조는 이것을 ‘교육이 현자를 통해 나오기 때문에 그 정령과 덕, 문장과 공경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미로 재해석했다. 곧 정조는 이 사현의 논리를 끌어들여 정치적 통치기술로 활용한 것이다.

 

430편에 이르는 정조의 치제문은 왕실인물, 선현, 노론계 인사, 생부인 사도세자 관련 인물, 자신과 관련된인물 등이 주를 이룬다.

 

송시열을 비롯한 민유중, 권상하, 김수항 등 노론계 인사 외에도 이종성, 이천보, 서지수 등 아버지 사도세자를 보필했거나 보호한 인물들, 김종수, 서명응, 남유용 등 세손 시절 자신을 보양하거나 재위 시절 신임을 얻었던 인사들에게 치제했다. 외가인 풍산홍씨 집안에도 자주 치제했는데, 외조부인 홍봉한은 13차례 치제문을 보냈다.

 

치제하게 되는 계기에 대해서도 정조는 특이했다. 통상 제사는 기신일(忌辰日)에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며,성복(成服), 발인(發靷) 등 치상(治喪)의 과정에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조는 이 외에도 시호를 내린 선시일(宣諡日), 과거 합격자 발표인 방방(放榜), 신도비 건립처럼 다양한 의식에 치제문을 내렸다. 특히 풍산홍씨 집안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자 치제하거나 남공철이 급제하자 아버지 남유용에게 치제하기도 했다.

 

정조는 유독 이순신과 송시열을 존경했다. 이순신에대해서는 1792년 강진 탄보묘(誕報廟)에 치제하고,1795년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되자 다시 치제했다. 이는 이순신이란 인물은 아무리 높여도 과장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조의 송시열 치제는 개인적인 존경과 함께 당시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남인을 등용함으로써 노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정조가 송시열을 높이고 그의 문집을 왕명으로 간행하게 한 것은 노론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소현서원(紹賢書院), 화양서원(華陽書院) 등 17곳의 서원에 치제한 것도 특이한 사례다. 서원의 제향 인물이 조선의 학문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를 통해 배출된 사림이 정계에 진출해 조선 후기 정치권을 장악했지만, 서원의 제향 인물에 대해 치제한 경우는 이전 국왕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더구나 치제한 대다수가 노론계 서원이라는 점은 정조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 준다.

 

신하에 대해 치제하는 선례를 남긴 영조와 글을 통해 세력을 확장한 송시열의 사례는 정조의 치제문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국왕이 치제문을 지어 내린다면 후손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었으며, 가문에 은혜를 베푼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된다.

 

정조는 치제문을 통해 사도세자를 비호하거나 자신을 도운 집단, 외가인 풍산홍씨를 자신의 우호세력으로 만들어 통치의 안정성을 모색한 것이다.

 

▲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비전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