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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간택처자의 복식은 명주와 모시를 넘지 말라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1/11/25 [10:3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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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명세자 가례등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임오년 정월 가례시 간택처자 의차>,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비전성남

 

조선왕실의 혼례는 금혼령에서 시작한다. 왕실 최고의 배필을 맞이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간택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초간택에는 팔도에 있는 적령기의 처자가 대상이다. 초간택에는 30명에서 35명 정도가 들어와 그중 7명이 선발된다. 재간택에는 초간택에서 뽑힌 7명 중 다시 3명을 추리고, 삼간택에서 최종 1인이 간택을 받는다.

 

이 처자들의 나이는 대체로 12살 전후다. 물론 왕이나 왕세자의 나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대체로 초간택에서 삼간택까지는 약 석달 정도가 걸린다. 이 과정에서 처자들의 신분은 사가(私家)의 처자에서 예비 세자빈으로 바뀌고 복식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819년 기묘년 조대비(익종의 비, 신정왕후)의 간택과정을 통해 이들의 복식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금혼령은 1819년 4월 16일에 있었다. 9세부터 13세까지의 처자에게 금혼령을 내리면서 가장 먼저 시행한것은 간택날짜를 잡는 것이었다. 초간택은 5월 초 6일,재간택은 5월 19일, 삼간택은 8월 11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초간택과 재간택에 들어오는 처자들의 복식은 ‘명주와 모시’를 넘지 말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과연 이 명은 얼마나 지켜졌을까? 처음에는 하나의 명에 불과했다.

 

실제 궁궐에 들어갈 때 처자들의 복식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달랐다. 사도세자빈 혜경궁 홍씨는집안이 극히 빈곤해 간택에 입고 들어갈 옷이 마땅치 않았다. 이에 “치마는 선형의 혼수로 쓸 것을 사용해서 만들었고, 안감은 낡은 것을 넣어 만들어 입었다”고 했다.

 

그러나 혼수로 장만해 놓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니 당시 최고의 옷감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만 안감은 낡은 것을 넣었다고 하니 빈곤보다는 검소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조대비 역시 초간택에 들어가 보니 다른 처자들은 모두 대단(大緞)치마를 차려입고 왔다고 하며, 본인은‘방사주(方紗紬) 치마에 사(紗)로 만든 견막이’를 입고 갔다고 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처자들이 입은 치마는 비단치마였음을 알 수 있다.

 

조대비는 명주치마를 입긴 했지만 저고리는 비단으로 지은 견막이로 예복을 갖춰 입고 들어갔다. 그런데도 이를 본 상궁나인들이 “아무리 검박한들 어이 이렇게 차려오리”라고 해 초라하게 입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점이 있다. 당시 혜경궁 홍씨는 할아버지가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역시 세자익위사 시절에 간택단자를 올렸으니 아무리 가난하다해도 딸자식 치마저고리 하나 지어 입힐 형편이 안 됐다고는 할 수 없다.

 

조대비 역시 증조할아버지가 조선에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이고, 아버지 조만영은 서장관을 지내고 있었으니 빈한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처자들과는 다르게 입음으로써 청빈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청빈함은 선왕 대부터 강조해 왔던 검소함에 대한 실천이다. 뼈대 있는 집안의 처자임을 복식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882년 순종 가례 시에는 간택처자에게 옷감을 내려준다. 이는 장서각에 소장된 ‘임오 정월 가례시 간택처자 의차’라는 고문서에서 확인된다. 왕실에서는 옷을 지어 준 것이 아니라 옷감을 내려주었다.

 

결국 각 집안의 바느질 솜씨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유니폼을 입혀 놓았으니 품행이 좋은 처자를 뽑는데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검소를 지향하던 왕실의 명분을 찾을 수 있는 결과이며, 복식을 통해 실리까지도 고스란히 챙길 수 있었던 살아있는 정책의 변화다.

 

이민주 책임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