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기자와 떠나는 성남역사기행 (4) 남한산성

  • 관리자 | 기사입력 2008/04/24 [16:23]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이야기(2)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더욱 관심을 갖게 된 남한산성은 흔히들 삼전도의 굴욕적인 화의(和議)로써 함락된 것으로 오인하기 쉬우나 남한산성은 천혜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한 번도 침략자들에게 함락된 적이 없었다. 병자호란 때 외부와 단절된 채 고립무원에서 45일간 항쟁하다 여러 가지 여건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성문을 열고 삼전도(현재 송파구)에서 화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시기 최명길, 김상헌, 삼학사 등 병자호란 시대의 걸출한 인물로 기억되는 남한산성의 모습도 있지만, 이를 축성할 때 전 국민이 참여했다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 대활약을 보였던 조선시대 승려들은 병자호란 후에도 산성승번제도에 의해 산성 내의 유지 및 보수, 그리고 방어를 책임졌다. 남한산성은 또 조선말 고종 때 많은 천주교인이 순교한 곳으로 국내 최대 순교지 중 하나의 모습이 있다.

조선시기의 남한산성은 태종 시기에 그 중요성이 제기되었고 세종 연간(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 비로소 군사시설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전후로는 선조 연간에 산성축조에 대한 논의가 있다가 ‘이괄의 난’ 이후 인조 때 개축되고 정조 시기에 재개축됐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초기에는 조선후기 5군영 중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돼 관할했는데 그 흔적이 현재 남아있는 서장대(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할 수 있도록 산성의 서쪽에 높이 만들어 놓은 대)인 ‘수어장대’다.

이 시기 성남시의 남한산성 유적으로는 남한외성이라고 하는 신남성의 동돈대, 서돈대가 있다. 전자는 중원구 상대원동, 후자는 중원구 은행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축조배경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7, 8문의 대포를 설치해 놓고 남한산성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축조는 숙종시기에, 영조 연간에는 100여명의 군병을 배치·방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개화시기에 신식군대 양성소로서 남한산성의 모습이 있다. 당시 광주 유수(조선 시대에,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의 외관(外官) 벼슬) 겸 수어사(조선 시대에 둔 수어청의 으뜸 벼슬)였던 박영효를 중심으로 500여 명의 ‘남한산성 군대’를 조직, 양성했다. 그와 대비되는 모습은 구한말 남한산성으로 위정척사 사상을 지닌 유생들 중심의 의병항쟁의 중심지가 된다. 1896년 김하락, 구연영 등 연합의병부대 1,600여 명의 의병이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항일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그 후 1905년 일본이 청을 물리치고 조선과 을사조약을 맺은 후 무기·화약 수거령을 내려도 이행되지 않자, 1907년 8월 의도적으로 남한산성내 있었던 조선시대 행궁을 비롯한 사찰, 무기고 등을 모두 파괴해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고 현재 장경사 일부와 수어장대만이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 근대개화와 항일운동의 본거지

일제강점기 때 1,000여 호 4,000여 명 인구의 산성리 마을은 부족한 농경지, 불편한 교통 등의 요인과 더불어, 항일의병 근거지를 초토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로 광주군청과 함께 치안·체신기관이 1917년 산성 밖으로 이전되자 급격히 쇠락하였다. 그 후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배 정책에 반대하는 3· 1운동이 발발했고 1930년대 남한산성은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 근대개화와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다.

광복 후 195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63년 국가사적 57호로 지정되었으나 부실 관리되다가 1971년 3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파괴된 성벽의 일부에 대한 부분 보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 지자체와 지역 문화인이 관심을 갖고 남한산성 재조명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에 남한산성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을 목적으로 지역학자들로 구성된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약칭 남사모)’이 결성돼 남한산성 행궁복원과 12km의 성벽 보수를 위해 애쓰고 있다.

남한산성은 치욕과 패배의 성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신라가 당을 견제할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고려 때 몽고가 쳐들어 왔을 때도 크게 물리쳤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식량부족으로 항복하였지 성이 함락된 것은 아니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기지역의병의 중심지로, 일제치하에서는 치열하게 항일 투쟁이 전개된 역사의 현장이다.

남한산성은 굴곡 많은 역사를 함께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등산이나 나들이를 하면서 역사 현장으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끝>

도움말_성남시 학예연구사 진영욱 729-3013

전미향 기자 mhchun@cans21.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