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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東泉) 남상목(南相穆) 선열(1876.4.2~1908.11.4)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5/02/24 [17:16]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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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의 의병장
 
우리 성남의 역사는 격동의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더이상 서울의 위성도시가 아닌 자립적이고 성숙한 40대의 도시로 우뚝 서 있다.
그 성남의 역사 속,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의병장 동천(東泉) 남상목(南相穆) 의병장의 정신이 곧 성남의 정신이다.
남상목(南相穆) 의병장은 1876년 4월 12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현 성남시 판교 하산운동 81번지)에서 출생했다. 유가에서 성장해 천성이 총명하고 강직하여 인품이 출중했다. 한학에 전념해 충효의 길에 힘을 다했다. 역학과 병서에 능통했으며, 장수가 될 제목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강제체결)돼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겪으며,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조국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염원으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
남상목 의병장이 29세 되던 해 고향인 낙생면까지 일제의 수탈이 시작됐다. 낙생면 하산운리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재료로 벌채하기 시작하면서 낙생면·언주면·돌마면의 주민들에게 강제노역을 시키는 만행을 저지르는 일본감독관에게 항거하다 체포돼 곤욕을 당했던 사건이 계기가 돼 남상목 의병장이 항일의병을 일으키게 됐다.
그 후 낙생·언주·대왕·돌마·용인 등지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해 서울로 진군하던 중 안성 죽산의 칠장사에서 왜적을 만나 격전, 광주일대의 의병 50명과 1906년 2월 단양으로 가서 참모관으로 조령탈환에 참전했다. 다시 경기도 광악산에 이진하던 중 남 의사의 행방을 쫓던 일본 헌병에게 ‘너더리 느릿골’에서 체포돼 1908년 11월 4일 33세의 아까운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으로 인한 장 파열로 옥중에서 순국한다.
아쉽게도 판결도 받기 전에 순국했기 때문에 기록이 미미하나 함께했던 의병들의 판결문에서 남상목 의병장의 기록을 찾아냈다.
성남에서는 2007년부터 성남문화원과 유일한 손자인 남기형 선생을 중심으로 ‘남상목 의병장기념사업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백범 김구선생 기요비서를 지낸 김우전 전 광복회장이 초대회장이 됐다.
이제 시민 100만 시대인 성남시는 ‘호국보훈의 도시’로 항일 의병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올 4월까지 백현동 낙생 대공원에 ‘성남 항일 의병기념탑’을 건립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200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남상목 의병장은 건국훈장이 추서된 후 1990년 12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남상목 의병장의 손자 남기형(75·태평동) 선생은 ‘찾아가는 독립운동교실’을 진행하면서 조국독립이라는 대의(大義)에 헌신한 값진 희생과 조국애가 올바르게 전해져서 국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 없지만 부산으로 이적된 판결문을 찾아다니는 동안 이제는 그분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서 후세에 성남의 의병정신을 이어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본인의 소명”이라고 했다.
이화연 기자 maekr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