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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발관, 새옥성 이용원

  • 관리자 | 기사입력 2008/08/25 [13:1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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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함께하며 30여년 이어 와

단대오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중동골목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중원구 중동 1930번지 ‘새옥성 이용원’이 있다. 이곳은 임한수(51) 씨가 30년이 넘게 ‘이발사’로 일하고 있는 일터다.
 
그는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비(장애3급)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부터 기술을 배우고자 결심을 했다. “처음엔 금세공 기술을 배우고 싶었어요. 친척 분이 소개해 주셔서 그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잠깐 이용 기술을 배웠는데 그것이 인연이 돼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좋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가서 많이 고생했다고 말한다. 

임한수 씨가 이용업에 입문한 70년대는 패션산업이 국제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우리나라에서도 그 변화가 시작됐다. 의상은 스타일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았으나 여자들의 머리모양에서는 머리를 틀어 올려 지적인 면을 드러내고 아가씨들은 긴 생머리나 웨이브로 멋을 내었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다양한 머리모양으로 변화를 주지는 않았으나 60~70년대 유행했던 장발과 상고머리, 삭발, 스포츠 형태가 있고 머리를 드라이하거나 고데를 했다. 또 이발관 옆에는 구두를 닦는 곳도 있어 선을 보는 사람은 이발을 하고 신발까지 닦는 등 한 곳에서 일명 토털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용기술은 ‘생계유지형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어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1961년 ‘대학생 교복착용, 중고생 삭발령’의 조치가 내려지면서 남성들이 이발관을 이용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용업은 유망직종은 아니었으나 개인사업자로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된 것이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이발관은 그 수가 많아 거리제한을 둘 정도였지만 이제는 한 동에 한두 개 남아 이발관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997년 IMF 위기를 맞으면서 이발관도 큰 타격을 입었다. 미용실이 많아지면서 이발업이 지금은 사양길로 접어들었지만 그나마 살림집과 가게가 함께 있는 그의 이용원은 가게세를 따로 내지 않기 때문에 지금껏 버텨올 수 있었다고 한다. 

부인 정순분(47) 씨가 면도를 마친 후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결혼하면서 남편이 몸이 불편하니까 돕기 위해서 면도를 배웠다”며 “처음엔 풍선과 제 팔에다 연습을 했어요. 제가 도와야 남편이 일할 수 있고 인건비도 줄일 수 있으니 힘닿는 데까지 남편을 도와야지요.” 부부는 각각 이발과 면도의 역할을 나누어 일하며 노모(75)와 세 명의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최근엔 경기침체까지 겹치자 손님이 워낙 없어서 가게시설을 다시 하는 등 재기를 위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금 이발관을 찾는 연령대는 40대부터 50, 60대 이상이다. 새옥성 이용원이 오랜 세월 변치 않고 이발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웃의 도움 때문임을 기억하며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니 제가 할일은 이용기술로 이곳을 찾는 손님께 정성을 다해 이발해 드리는 것이지요.”

새옥성 이용원 749-7220 
박인자 기자 ninga08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