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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떠나는 성남역사기행 (9)

  • 관리자 | 기사입력 2008/09/24 [18:1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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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를 헤쳐나간  이름난 재상 이경석

▶ 국익 위해 삼전도비문 짓고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높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산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곳곳에서 역사가 숨쉬고 있는 남한산성(2008년 3·4월 연재)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달에는 성남지역의 인물 중 남한산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인물인 백헌 이경석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그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상보, 호는 백헌이다.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6대 손으로 병자호란과 관련된 인물로 전후 삼전도 비문(병자호란 후 인조의 항복을 받고 청나라 태종이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지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인조는 이 비문을 짓기 위해 당대의 명문장가들에게 명했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않았다. 청을 찬양하기 위한 전승비인 삼전도 비문을 짓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집안의 명예까지 떨어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조선을 위해 비문을 지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인조는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일이라며 명분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해 달라고 이경석을 설득했고, 그는 국익을 위해 비문을 짓게 됐다. 국익을 위한다지만 어찌 그 일이 편안했겠는가. 그는 이 비문을 짓고 문자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 위급한 조정 위해 자신을 희생
이경석은 효종1년인 1649년에는 영의정 자리에 올라 효종의 북벌정책에 참여했는데 이 계획이 김자점, 이언표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청나라의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왕과 조정이 위급에 빠진 때 이경석은 재상으로서 목숨을 걸고 모두 자기 책임으로 돌렸다. 이에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을 구하고 청제의 명에 의해 압록강변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됐다. 이듬해 풀려나기는 했으나 ‘영원히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이보다 2년 전 명나라와 내통한 일이 탄로 났을 때에도 이경석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만주 봉황성에 갇혔다. 당시 이경석은 척화파가 아니었는데도 청나라에서는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현종 9년(1668)에는 국왕의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 궤장(의자와 지팡이)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왕이 내린 궤장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예이다. 궤장과 궤장을 받은 내력이 기록된 사궤장연회도첩은 보물 제930호로 지정돼 있다.

▶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
그의 묘소는 분당구 석운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경기도기념물 제84호로 지정돼 있다. 그의 묘소를 찾았다가 전주이씨 백헌공파 12대 종손인 이완주(65) 씨를 만나, 묘역 입구에 자리 잡은 신도비와 난세의 재상 이경석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신도비는 2개로 옛 것과 새 것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구비(영조30년 건립)는 4면 모두 글자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글자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이렇게 마모된 것은 자연 풍화작용에 의한 것이 아닌 인위적인 행위로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인위적으로 쓰러져 개울에 박혀 있던 신도비를 자손들이 재건했다. 이완주 씨의 안내를 받으며 언덕에 오르니 이경석의 묘가 있었다. 묘는 하나로 부인 유씨와의 합장묘이다.
이경석, 그는 인조·효종·현종의 3대 50년에 걸쳐 나라 안팎으로 얽힌 어려움을 적절하게 헤쳐나간 시대의 명상(名相)이었으며 자신보다 관료로서의 책임을 먼저 생각한 인물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단지 삼전도 비문을 지은 인물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 이유는 명분만을 생각하고 당시 국제정치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세력들의 생각이 조선후기 내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자신의 이름이나 명분보다 공익을 중시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도움말=성남시 학예연구사 진영욱 729-3013
박인경 기자 ikpark94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