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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남한산성‥ 김상헌과 최명길,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7/12/21 [14:27]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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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남한산성이 현재의 국제 정서와 맞물려주목받았다. 병자호란 당시 명분과 실리로 맞섰던 서인의 두 거두 김상헌과 최명길. 이들이야말로 아직까지 그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애국애족의 인물이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는 청음(淸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병자호란 때척화파(斥和派)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호란이 끝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청나라에 대해 복수하고 치욕을 씻기 위해 와신상담의 뜻을 가다듬을 것을 주청했는데,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70세의 병든 몸으로 청나라에 끌려가게 됐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호는 지천(遲川), 아버지는 영흥대도호부사 기남(起南)이다. 최명길이 주화파가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가 여진족의 위협때문에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영흥대도호부사로 부임해 점점 세력이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상대하면서 장차 국난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아들 명길에게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은 오로지 <和> 한 글자뿐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최기남의 묘가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에 있다.

마침내 병자호란(1636년)이 터지고 인조와 대신들 그리고 조선군 장병들은 남한산성 안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산성 밖에서는 불쌍한 백들이 청군의 만행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산성 안에서는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끝없는 입씨름이 계속됐다.
 
1637년 1월 18일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신(臣)’을 칭하는 항복문서를 만들자 이를 본 67세의 예조판서 김상헌은 항복문서를 찢어 버리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명망 있는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소?” 그러자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주워 맞추면서 말했다.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나라 군복인 푸른 수달피옷을 입고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를 맹세했다. 이것이 삼전도 굴욕이다.

전쟁 후 최명길은 호란의 뒷수습을 하는 데 동분서주하며 명나라 군대를 도와줬는데, 이런 일들이 청나라에 알려지게 돼 1642년 청나라에 불려가 사형수를 가두는 북관(北館)에 갇히게 됐다. 거기서 2년전에 먼저 잡혀온 김상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방에 같이 있게 됐다.

최명길이 처음에는 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해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했는데, 같이 구금되자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했다. 김상헌도 처음에는 명길을 의심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이에 두 집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했다. 김상헌이 시를 짓기를 “양대의 우정을 찾고(從尋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頓釋百年疑)”고 하니 최명길이 답하기를,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吾道如環信所隨)”고 했다. 결국 척화와 주화파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한가지라는 것을 알수 있게 됐다.
 
윤종준 성남문화원 부설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