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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성남 역사 이야기(5)

  • 관리자 | 기사입력 2009/05/26 [00:09]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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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 송산 조견 선생

우리 고장 역사 인물 송산 조견(松山趙,1351~1425) 선생의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경(巨卿), 이름은 윤(胤)이었는데, 고려가 망하니 자를 종견(從犬)으로, 이름은 견으로 고치고 호를 송산이라 했다. 조선 개국 1등공신인 조준(趙浚)의 아우다.

시호… 다스려서 잘못이 없어 평(平), 화평하고 온순해 시비가 없어 간(簡)

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에는 젊었을 때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 문과에 급제해 고려 말 안렴사(按廉使, 각 도의 으뜸벼슬)가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상장군(각 군영의 으뜸 벼슬, 정삼품)으로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됐다고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1421년(세종3) 3월 23일에는 궤장( 杖)을 하사받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으로 승격됐다. 양주의 정절사(旌節祠), 송산사(松山祠)에 배향됐다. 1425년 5월 3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평성부원군조견의 졸기>에도 그러한 이력과 함께 그가 별세하자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를 하사하고 관에서장사를 치러주었다고 했다. 시호를 평간(平簡)이라 하니,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이 평(平)이요,화평하고 온순하여 시비가 없는 것이 간(簡)이다.

‘고려 안렴사’로만 기록되길 원해

그런데 그 이후의 기록에서는 조견이 조선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온다.
이유원의 문집『임하필기』에는 왕조를 혁명하는 즈음에 형(조준)에게 울며 간했으나 끝내 듣지 않자 송산에 숨어 이름을 견으로 고쳐 견(犬)이라는 부수를 쓰고 호를 송산(松山)이라 했다. 대개 이름은 견마(犬馬)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뜻이고, 호는 산이 움직이지 않고 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조준은 아우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몰래 개국훈(開國勳)에 기록해 억지로 평성부원군에 봉했다. 조견은 세상을 떠날 때 자손에게 훈계를 남겨비석에 ‘고려 안렴사’라고만 쓰고 조선의 벼슬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자손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해 한결같이 훈적(勳籍)대로 썼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석의 벼슬을 쓴 부분에 내리쳐 현재는 ‘공지묘(公之墓)’ 세 글자만 남았다고 한다.

태조가 친히 주는 벼슬 거절

처음에 조견은 두류산(頭流山=지리산)에 은거하다가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겨왔는데 태조가 친히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조견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했는데,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망경봉(望京峯)’이라 했다.

태조가 청계산으로 조견을 만나러 가기에 앞서 형인 조준이 먼저 만나러 갔다. 조견은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서 통곡하면서 “나라도 망했고 가문도 망했으니 이제 임금도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돌아보건대 어찌 형제의 정이 있겠습니까?”라고 해 조준은 끝내 그를 볼 수 없었다.

태조가 고인례(故人禮=친구의 예)로써 만나자고 설득하니 할 수 없이 만났는데, 손을 올려 읍만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며 할말을 기탄없이 해 버렸다. 태조가 이를 모두 용납하고 돌아가면서 말 채찍으로 땅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몇 리까지를 조견의 땅으로 삼아 그의 정절을 표창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또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끝내 이를받지 않고 양주(현재 의정부시) 송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중원구 여수동 묘역, 시 향토유적으로 지정

조견이 죽자 세종대왕은 백관들에게 명하여 검은 띠를 3일 동안 차도록 했다. 경기도 기념물 제42호인 송산사(松山祠)는 현재 의정부시 민락동에있다. 성남문화원에서 개최한 제1회 학술토론회(1999.7.22)에서「고려 말기 정세(문수진)」, 「송산조견 인물연구(한춘섭)」등의 논문발표와 토론을 거쳐, 중원구 여수동 산30번지에 위치한 묘역(사진위)에 대한 문화재 지정 청원이 이뤄져 성남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2001.2.20)돼 보호되고 있다.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정리 : 윤종준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