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기획연재 - 성남 역사 이야기(6)

  • 관리자 | 기사입력 2009/06/23 [18:04]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국가 수호를 위한 자발적 의혈 민군 성남 의병 전쟁

성남지역, ‘정미의병’ 때 봉기
성남지역의 의병활동 시기는 한말 격동기의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오던 조선은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분연히 봉기(蜂起)했다. 이후 1905년 일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늑결(勒結)했고, 이에 대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한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 퇴위됐다.
이를 발단으로 1907년 ‘정미의병’ 봉기 때에는 해산된 군인들조차 무기를 빼앗기지 않고, 의병 대열에 합류해 구국필사 정신으로 싸웠었다.


우리 고장 남상목 의병장, 무장투쟁 앞장
이 시기에 성남과 인근 광주 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상목 의병장(1876년생,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과 윤치장 의병장(1876년생, 광주군 대왕면 금토리)을 꼽을 수 있다.
남상목 의병장은 광주와 서울 강남 및 용인 용천곡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해 문경지역의 이강년부대와 합진해 참모관으로서 죽령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음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에 패하기도 했으나, 안성 죽산의 칠장사를 근거로 무장 투쟁을 전개해 안성 시내를 공격하는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적은 남상목 의병장을 보좌했던 송주상, 김재선, 김태동 등의 재판 기록과 남상목 의병장이 순국했을 때 의병진에 이 사실을 통고한 <통고장>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영춘, 죽령 전투에서까지 큰 전공을 세우다, 잠시 고향으로 오던 중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현재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부근에서 잠복하고 있던 일본 헌병에 체포됐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33세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현재는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영면(永眠)했고, 2007년 성남문화원(원장 한춘섭)과 후손(증손자 남기형)의 노력으로 기념사업회를 창립, 2008년에는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국가보훈처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청원해 지정받았다.


윤치장 의병장, 군자금 모집
윤치장 의병장은 1907년 과천, 대왕, 낙생, 언주일대의 의병 70명을 규합(糾合)해 의병을 조직한뒤, 무기확보와 군자금 모집에 적극 활동했다. 경성 공격을 준비하던 중 현 미아리 고개에서 일본군에 체포, 징역 1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23년 일본국 왕자 출생의 특사로 석방됐다. 1971년 96세로 별세했고, 1983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 외에도 이명하(1878년생, 대왕면 출생), 남공필(1863년생, 광주 출생), 박성삼(1876년생, 광주출생), 배천봉, 강복선, 김광희, 김광준, 정철화, 이춘삼 등의 애국적 의병이 있다.


빈곤한 자료 발굴이 과제
시시각각으로 국제정세가 불안한 요즘, 불과 100여 년 전 우리가 처했던 비참한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고장 성남의 고귀한 선열들에 대해, 빈곤한 자료지만 찾아내고 복원해 미래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시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길 바란다.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정리 : 이보영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