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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남 역사 이야기(7)

  • 관리자 | 기사입력 2009/07/23 [17:1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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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탄천 이지직(炭川 李之直)

둔촌 이집의 장남, 향토유적 제7호 ‘탄천 선생’
성남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돼 있는 광주이씨 문중의 인물 중에서 청백리로서 눈길을 끄는 역사 인물이 탄천 이지직(1354~1419) 선생이다. 둔촌 이집 선생의 장남인 지직(之直)은 성인(聖人)이 삼덕(三德 : 直, 剛, 柔)을 명목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것을 연유로 이름을 지었다. 之直은 곧, 바르게 하고 곧게 해 그 떳떳한 일을 순하게 한다는 뜻이다. 지직의 자를 백평(伯平)이라 한 것도 성인이 곧은 것을 평탄하고 편안한 세상에 쓴 것을 의미한다. 생애의 말년을 탄천가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냈기에 탄천 선생이라 불렸다.

깨끗하고 곧은 사람이란 평판 자자해
탄천 선생은 일찍이 포은 정몽주로부터 공부했는데 학문이 고명(高明)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일을 처리함에 엄정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덕행은 순일(純一)하고 청백(淸白)했다.
1398년(태조 7) 보문각 직제학 재임 시, ‘소도<昭悼 : 방석(芳碩)>의 변란’(제1차 왕자의 난)이 있자, 정안대군(靖安大君=이방원)이 병사를 지휘해 나설 즈음 탄천 선생이 길을 막고 울며 말리기를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한데 부왕(父王) 앞에서 아우를 죽여 어떻게 하시렵니까? 순리대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니 좌우에서 선생을 해치려 했다.
그러자 정안대군이, “이모(李某)는 나의 옛 친구인데 그가 어찌 소도에 아부해 그랬겠느냐?” 했고, 변계량이 홀로 구원하기를 “李某는 깨끗하고 곧은 사람이다. 그의 말은 가히 믿을 만하니 백이숙제와 다름이 없으므로 다만, 그 직책만 파하고 문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그 말에 따랐다.

후일 청백리에 오르고 영의정에 추증
1402년(태종 2) 4월 1일에는 좌정언 전가식과 함께 나라 일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군사와 외교에 대한 정책과제를 제시하면서 “전하께서는 의복과 어가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매우 좋아하여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시고, 대간(臺諫)의 말이 어쩌다가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견책(譴責)을 가하시며, 매[鷹]와 개[犬]를 좋아하고 성색(聲色)을 즐겨 하심이 아직도 여전하십니다”라고 통렬한 비판을 했다. 이에 태종은 자존심이 상해 “나의 과실을 비밀히 아뢰어도 내 어찌 안 듣겠는가? 이제 글을 이루어 사책(史冊)을 쓰게 하니, 내 매우 가슴 아프다” 해 결국 다음 달 파직 당하게 된다.
말년에 탄천가에 은거하니 벗들이 시를 보내 위로했고, 태종이 말년에 세종에게 다시 등용하라고 당부해, 세종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형조 우참의에 등용하고자 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후일 청백리에 올랐으며 영의정에 추증됐다.
경남 창녕 운곡서원에서 탄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 제사를 지내는데 제문에 이렇게 전해온다. “타고나신 그 모습 황금 같은 정조요 / 굳센 정조 씩씩하기 얼음같이 결백했네. / 말머리 두드리며 잘못을 막는 소리 / 가을날 서리같이 늠름하고 열렬하도다.”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정리 : 윤종준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