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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남 역사 이야기(9)

  • 관리자 | 기사입력 2009/09/25 [16:4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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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의 표상, ‘강정일당(姜靜一堂)’

참아내, 참어머니, 문사…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
강정일당(1772~1832)의 생애에서 보여 준 효행과 참아내의 도리, 참어머니상과 문사(文士)로서의 품격은 한국인의 표상이라 일컬을 수 있다. 강정일당은 1982년 강주진 박사가 국역한『정일당유고집』이 출판되면서부터 알려졌다.
당시, 성남문화원 조명천 초대원장이 자료를 수집하고, 현 한춘섭 원장이 시조시인으로서 『여류문사, 강정일당』이란 논문을 쓰면서부터 점차 그 인품과 학문의 세계가 알려져, 사후 154년 만인 1986년 성남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됐다. 또한 성남문화원에서 ‘강정일당상’을 제정, 시상하게 된 것은 그의 훌륭한 인품을 기리고 본받고자 함이며, 올해 12회째 진행되고 있다. <성남사랑 글짓기> 추모 연례행사도 18년째에 이르고 있다.

가난한 남편의 학업 길잡이로 헌신
강정일당은 1772년 10월 15일, 충북 제천에서 아버지 강재수,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 2남 1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두 여자가 안고 있던 여자아이를 맡기며, ‘이 아이는 지극한 덕이 있어 지금 너에게 맡기니 잘 기르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일당이 출생했다. 정일당의 인품은 곧고 정결하고 한결같이 단정하여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정일당이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심히 슬퍼하다가 죽을 고비를 맞은 일이 있었으니, 이로써 부모에 대한 효심이 남들과 같지 않았다.
19세 때, 여섯 살 연하인 윤광연과 결혼했다. 윤씨 가문은 학문을 높이 숭상한 명문가였으나, 남편은 가난 때문에 글공부를 못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정일당이 길잡이가 되어 주고 헌신적으로 학업을 도우니, 마침내 윤광연은 좋은 스승과 친구를 사귀어 말년 즈음에는 유림계에서 부러움을 사는 위치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일당은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는데 모두가 남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정은 여전히 가난해 병이 나도 약 한 첩 먹을 만한 여유가 없어 3일 동안 혼절한 상태로 일어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더구나 정일당은 5남 4녀를 낳았지만 젖이 부족한 상태에 가난해서 치료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아홉 남매를 모두 여의었다.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그녀는 훌륭한 문인이었다. 정일당을 평한 권우인(權愚仁)의 글을 보면, “비록 부인이 지은 것이라 하나 여자의 기상이라고는 전혀 없고, 산 속에 숨어 사는 선비가 뜻이 있어서 학문을 연구하는 글과 같다. 우리나라에 신사임당과 임윤지당, 두 부인의 덕행이 있었는데 사임당은 시를 잘하고 윤지당은 문을 잘해서 이름난 분들이다. 정일당은 시문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잘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강정일당은 올바른 현모양처의 표상이며, 위대한 스승이며, 우리의 큰 어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2005년 7월,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도록 추천한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은 추모시와 비문을 지으면서 강정일당을 칭송, 오늘날 이 시대 앞에 현창 으뜸의 여성 표상(表象)으로 지적했다.
 “청계(淸溪)는 맑고 깨끗하네. 둔산(遁山)은 겹겹이 에워싸서 산소 자리 또한 좋으니, 여사는 여기 편히 쉬도다. 부인의 거룩한 덕을 후세에 알리노니, 이 기록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서 역사 쓰는 사람의 자료가 될 것이니라.”(한춘섭 지음)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정리 : 윤종준 상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