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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명품도시 성남시 탄생의 뿌리] 49주년(8월 10일) 맞은 광주 대단지 사건

윤종준 성남문화원 부설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0/08/24 [15:21]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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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사건?’ 성남의 역사도 50년의 나이테로 자라나서 청소년 세대는 이게 어떤 사건인지 잘 모를 것이다. 이 사건은 성남시 탄생의 계기가 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올해는 유난히 긴 장마와 폭우로 인한 물난리까지 겹치면서 사람들의 시름을 깊게 한다. 당시에는 장마와 폭우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온 길을 따라 49년 전의 성남으로 가 본다. 

1971년 8월 10일,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주먹구구식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해 생존권을 요구하며 오전 10시부터 6시간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인해 1973년 7월 1일 성남시가 탄생하게 됐다.

성남시가 생기기 전의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에 속해 있었다. 성남 원도심 일대는 농지보다 산지가 더 많았다. 남한산성 자락의 한적한 산골마을인 이곳에 서울시 철거민들이 이주했다.
 
1968년 서울 시내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기 위해 토지매입가격이 낮은 경기도 광주군에 ‘광주대단지’를 조성하고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 계획으로 이주민의 생계대책과 비바람을 피할 집도 지어지지 않은 채 즉시 강제 이주를 진행해 인구가 순식간에 14만 명을 넘어섰다.
 
주민들의 생계대책은 막막했고, 민심은 흉흉하기만 했다. “굶주림 때문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돌 정도로 이주민의 생활상은 참혹했고, 실제로 겨울에 천막생활을 하던 일가족이 얼어 죽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당초 서울시는 철거민들에게 1가구당 20평씩 평당 2천 원에 분양해주고 그 대금을 2년 거치 3년 상환토록 했으나, 광주대단지에 토지 투기 붐이 일면서 6,343가구의 전매 입주자가 정착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자, 이들에게 평당 8천~1만6천 원에 이르는 땅값을 일시불로 내게 하고, 취득세·재산세·영업세·소득세 등 각종 조세를 부과했다.
 
서울시 행정당국은 광주대단지에 주택은 물론 이주민들이 먹고 살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자족도시로 만든다고 선전을 했고, 이 말을 믿고 전국각지에서 몰려 들어온 주민들은 대부분이 실업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폭등한 땅값 일시불 납부와 각종 세금부과 조치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이다.
 
1971년 8월 10일 오전 11시 주민과의 면담을 약속한 양택식 서울시장이 주민들이 모여있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자 격분한 주민들은 “배가 고파 못 살겠다”, “일자리를 달라”, “천 원에 매수한 땅 만 원에 폭리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비가 내리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벌이면서 출장소와 관용차·경찰차를 불태우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사실상 광주대단지 전역을 장악했다.
 
이날 시위는 오후 5시경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기로 약속함으로써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백여 명이 부상하고 주민 23명이 구속됐다.
 
시위 발생 당일 12시, 새로 발령받은 내무부 소속 부이사관급 직원 등 40여 명이 내무부 청사 대회의실 근처에서 사령장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지역개발담당관(이후 새마을담당관)으로 내정된 고건(高建) 훗날 국무총리가 있었다. 광주대단지에서 시위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그는 사령장도 받지못하고 광주대단지사건 수습 업무에 투입됐다.

고건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광주대단지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신도시 정책이 <선(先)입주 후(後)개발>에서 <선개발 후입주> 정책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됐다고 기록했다. 

선개발 후입주 정책의 첫 결과가 1기 신도시(성남시 분당, 고양시 일산, 부천시 중동, 안양시 평촌, 군포시 산본) 건설이다. 1기 신도시 건설로 우리나라는 본격적으로 아파트 위주의 주거환경 시대에 접어들었다.
 
명품 신도시 분당 9만7,500호가 탄생된 역사적 배경이 광주대단지사건에 있고, 이후로 판교테크노밸리와 위례신도시 건설로 이어지면서 우리 시는 불과 50여 년 만에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명품도시로 변화 발전해 왔다.

내년이면 이 사건이 발생한 지 50주년이 된다. 사건 당시 ‘난동’, ‘폭동’ 등으로 표현됐던 이 사건의 성격 규명을 통한 새로운 명칭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남시의 발전과정을 이해하고 우리나라 신도시건설정책의 대전환을 가져온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근래에 이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다양한 문학작품과 문화예술 활동의 콘텐츠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