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구 쌀 상회’에 들어서다 발걸음을 멈췄다. 전화번호를 다시 읽어 보았다. 국번이 두 자리 다. 42국에 4817, 45국에 6714. 간판이 몇십 년 전 그대로다. 산성동 ‘팔구 쌀 상회’는 긴 시간을 지나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5살 새댁이었던 탁매월(78) 사장은 “남편과 함께 모란장, 판교장, 분당장, 광주장을 돌며 양곡을 팔았다. 둔전동에 살 때였다. 성남 서울공항 비행장이 확장되면서 산성동으로 이사해 자리를 잡고 얼마 후 팔구쌀상회 간판을 달게 됐다”고 한다.
탁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거간(중개업자), 둔전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 속 낱말과 전화 국번이 시간을 훌쩍 뒤로 돌려놨다.
가게는 한산했다. 늘보리, 찰보리, 검정보리, 서리태, 귀리, 엿기름 등 여러 잡곡과 흰쌀이 포대에 담겨 옹기종기 모여 있다. 쌀에 꽂힌 원산지 표시판에 1kg 3,500원이라고 쓰여 있다.
“옛날에는 주로 외상 손님이었지 현금 손님은 없었어요. 한 달 동안 외상으로 가져다 먹고 월급 받으면 갚고 다시 한 달을 외상으로 먹고 그랬죠. 외상 떼어먹고 간 사람들도 많았어요.”
양곡 장사와 관련된 탁 사장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못사는 사람들은 되로 사다 먹고, 그나마 좀 살고 식구가 많은 집은 반 가마(40kg)씩 팔아다 먹었어요. 그것도 모두 외상, 떼먹힌 외상값 받으러 갔다가 되려 쌀 사다 주고 온 적도 있어요. 굶고 있는데 어쩌겠어요” 하는 탁 사장의 마음씨가 쌀처럼 풍요롭게 느껴진다. 그래도 그때가 장사는 잘됐다고 한다.
풍구로 지푸라기를 날린 후 석발기(돌 고르는 기계)에 쌀을 넣으면 용케도 기계는 돌을 고르고 하얀 쌀만 걸러냈다. 돌이 골라진 쌀이 석발기 아래에 놓인 큰 다라이(고무 대야)에 수북이 쌓이면 사람들이 와서 한 되, 한 말, 반 가마씩 팔아갔다.
지금 쌀에는 눈을 씻고 봐도 돌은 찾아볼 수가 없다. 쌀 속에 섞여 있는 돌과 함께 석발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쌀집 아이들은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을까? 어머니와 딸의 대답이 다르다. 팔기에 바빠 쌀밥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는 엄마와 쌀장사하는 부모님 덕분에 쌀밥은 실컷 먹었다는 딸 순예 씨다. 현재 엄마를 도와 상회를 운영하는 순예 씨 기억 속에는 어린 동생을 고무 대야에 앉혀 놓고 장사하던 장터에서의 엄마 모습이 남아 있다.
언제부턴가 쌀가게가 동네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쌀가게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양곡상 허가제를 운영하던 정부는 1994년 양곡관 리법 시행령을 개정해 양곡 판매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변경했다. 어디서나 양곡을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쌀가게는 변신을 꾀하며 변화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가게가 사라졌다. ‘돌 없음’이란 푯말을 달고 큰 다라이에 담겨 있던 쌀이 이제는 포장돼 마트 매대에 놓여 있다.
지금은 쌀을 산다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옛날에는 ‘쌀 팔아 온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 돈 을 주고 쌀을 사 오면서도 늘 ‘쌀 팔러 간다’라고 했다.
쌀 팔러 간다는 말과 같이 동네 쌀가게도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쌀가게는 여전히 손님을 맞고 있다. 그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취재 윤해인 기자 yoonh1107@naver.com 취재 박인경 기자 ikpark94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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