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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3주년] 3·1운동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다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2/02/24 [12:24]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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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시작했던 장소(동그라미)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공약3장에서)

 

고종황제는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 고종황제가 갑자기 서거했는데, 커피에 일본이 독을 넣었다는 설이 파다했고, 고종 서거 직후에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 고종의 서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와 함께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만세시위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는 평화적 시위, 밤에 산에서 횃불과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횃불시위,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를 들고 관공서 등을 공격하는 무력시위 등으로 전개됐다.

 

숯골(성남 원도심) 주민 300여 명은 남한산성 안에 있던 중부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부르며 면장의 동참을 요구했다. 면장이 거부하자 곤봉으로 가격해 실신시키는 등 과격한 양상으로 전환했다.

 

숯골의 농민 김교상은 인쇄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이재인, 안교동 등과 함께 1920년 음력 4월부터 6월까지 독립에 관한 각종 인쇄물을 제작했다.

 

그는 ‘대한독립운동을 위하여 생명 재산을 걸고 대한독립단 중앙부의 명에 복종할 것을 맹서함’이란 내용이 기재된 서약서 약 1천 매를 비롯해 조선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내용의 경고문 약 200매, 암살단 취지서 약 3천 매, 대한독립단 지방부 시행 규령 80권, 선포문 약 1천 매, 대한독립단 경무국 시행 규령 약 340권, 대한독립단 취지서, 포고서 등을 인쇄 출판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돌마면(분당)에서는 한순회·한백봉이, 낙생면(판교)에서는 초대 낙생면장 남태희 등 지식인층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주도함으로써 참가자가 증폭됐다.

 

성남지역의 만세시위는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일본은 <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시위 군중이 3천 명이라고 기록했다.

 

돌마면장 이준구와 낙생면장 남태희는 사직서를 내고 대문에 태극기를 내걸었고, 구천면(서울 강동)장은 일본 헌병이 쏜 총에 시위현장에서 즉사했다.

 

천도교 광주교구장 한순회는 1918년 10월부터 1919년 4월까지 특별 성미를 갹출해 천도교 중앙총부로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에 더욱 열중했고,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를 설립해 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멸왜기도운동’을 전개했다.

 

여수리 출신의 이시종(19세)은 송파시위에 참가한 후 대왕면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조선독립신문>의 독립에 관한 기사를 가지고 수서리에 돌아와 이재순, 이규문 등 100여 명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이시종은 군중에게 “오늘까지는 이 면사무소에서 일본을 위하는 일을 보고 있었지만, 이제 조선이 독립하게 돼 부역, 세금 등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의 소견을 발표했다. 이시종의 발언은 일제의 가혹한 부역과 세금에 반대한 것이었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사례라 할 수 있다.

 

3·1만세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民國’이라는 국호에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코로나19로 힘든 세상이지만 <독립선언서>의 한 구절을 되새겨본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윤종준(성남문화원 부설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