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독자가 1950년 16세 때 6·25 전쟁을 겪고, 후세에 남기고 싶은 것이 있어 당시 목격한 바를 적어놓은(회고한)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1950년 평양 교외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집 100여 미터 앞에는 철로가 있었다. 4월 초 휘장으로 가리운 탱크를 실은 기차가 남행하는 것을 나는 봤다.
10여 량의 열차에 실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탱크 앞뒤에 기관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인민군의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것으로 봐서 전선으로 가는 탱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휘장으로 가리지 않은 탱크가 지나갔다. 철로가 언덕에 있었기 때문에 기차의 속도가 매우 느렸다. 우리는 학교에 갔다 오면 철로 가까이 가서 지나가는 탱크를 쳐다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그 다음에는 인민군을 가득 실은 기차가 지나갔다. 우리는 가까이 가서 손을 흔들어줬다. 그들도 환호하면서 창밖으로 무엇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편지인데, 속에 돈을 넣고 실로 묶은 것이었다.
그 돈으로 눈깔사탕 사 먹고 편지는 버려도 보는 사람 없었겠지만, 그렇게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하나같이 우표를 사서 붙이고 우체통에 넣었다. 인민군들이 무슨 부탁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우리는 어떤 절박함을 느꼈다.
편지만 던진 것이 아니라 종이를 던지는 군인도 있었다. 편지를 던지는 수보다 훨씬 많았는데, 거기에는 하나같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38선으로 간다. 안녕!’
그 무렵 나의 아버지는 ‘자반병’이라는 희귀병으로 김일성대학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6·25가 일어나기 3일 전인 1950년 6월 22일, 병원당국으로부터 “전원 퇴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담당 간호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병이 낫지도 않은 환자를 전원 강제로 퇴원시키면 우리는 죽으라는 말입네까?”
“지금 38선에서 남조선 국방군과 인민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부상병들이 실려 오니까 곧 병실을 다 비우라는 상부의 지시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 집 옆에 평양역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녁에 그가 놀러 와서 아버지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여러 주 전부터 신의주에서 오는 기차가 있는데, 그 기차가 나타나면 모든 기차는 다 세우고 38선으로 보내고 있어요. 그런데 그 기차는 만주 안동에서 오는 기차로, 거기에 탄 군인은 해방 전 모택동의 팔로군 밑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운 조선의용군이래요. 군대만이 아니고 셰퍼드를 가득 실은 기차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무기를 실은 기차도 있어요. 아무래도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요.”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때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의용군의 수는 약 3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는 팔로군 포병사령관 출신의 (김)무정 장군도 있었다. 평소에 무정은 김일성을 우습게 봤다는 증언이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는 팔로군 주력부대인 포병사령관을 지낸 3성 장군이지만, 김일성은 소련군의 일개 대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김일성도 무정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김일성은 무정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그 소식을 접한 무정은 헛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으로 허허벌판이 된 평양을 사수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정이 예상했던 대로 김일성은 수도를 사수하지 못했다는 죄명으로 무정을 숙청했다고 한다.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자 승승장구하던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후 1·4 후퇴 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때 나는 중3이었다.
*독자 수필(원고지 5매 내외, A4 ½장 내외), 사진(성남지역 풍경, 사람들-200만 화소 이상)을 모집합니다. 2022년 8월 10일(수)까지 보내주세요(주소, 연락처 기재).채택된 작품은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보내실 곳 <비전성남> 편집실 전화 031-729-2076~8 이메일 sn997@korea.kr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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