꽹과리, 징, 장구, 북, 상모를 돌리는 아이들이 지나가고 그 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따라가는아이들의 행렬이 있었다. 뭐야, 뭐야? 초등 6학년이 되는 해 1973년 광주군에서 성남시로 승격되는 날, 축하하러 가는 성남제1초등 6학년 동급생들이었다.
1969년 9월 우리 가족은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 현재 성호시장이 있는 중앙동으로 이사 왔다.
그때 당시 도로는 천호동에서부터 잠실, 복정, 가천역, 태평역, 모란역 쪽의 현재 지명인 성남대로밖에 없었고, 지금의 성남시청이나 분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포플러나무가 쭉 뻗은 작은흙길이었다.
모란까지만 버스가 들어와 하루 두서너 번 있는 버스를 타려고 경쟁이 심했다. 걷거나 리어카,소달구지 같은 이동수단밖에 없었다. 진흙 수렁이 많아 장화 없이는 다니기 힘든 곳이었다.
시민들은 풍생중고등학교 앞 하천 정비 등 취로사업에 참여했고, 남한산성 주등산로 만드는 일에도 참여하고, 어린 학생들은 코스모스 등 꽃을 심어 거리를 아름답게 가꾸었다.
‘성남에 고향을 심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주민들이 본적을 성남으로 옮기기도 했다. 남편도 경남에서 성남으로 본적을 옮겼다.
나는 성남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해서 성남이 고향인 아들과 딸을 낳고 키워, 지금은 성남이 고향인 2023년생 손자도 생겼다.
지난 16년간 에너지절약 활동도 열심히 하고 지역 봉사도 하면서 삶의 터전이 된 이 터는 바로자랑스러운 성남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소풍은 거의 남한산성으로 갔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가뭄이 심해 미처 못한 모내기 일손을 돕기 위해 성남 전체 고등학교 학생들이 성남 이곳저곳 모내기를 나갔다.
우리 학교는 이매동으로 갔는데 거머리에 물릴까 봐 처음으로 스타킹을 신고 모내기를 했고, 고무 다라이에 담아온 밥과 나물을 맛나게 먹던 기억이 있다.
탄천에 아버지와 천렵을 가서 된장과 깻묵을 섞은 떡밥을 어항 입구에 발라 기다리다가 피라미, 빠가사리 등을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평생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판교의 직장은 지방으로 이전했고, 아름다운 연못과 잔디밭의 직장 터는 판교 제2테크노밸리로 변해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 터는 여전히 살아 숨쉬며 50년 동안 시민들의 힘으로 기적을 일구어 나갔다.
이제 성남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교통의 요지, 지하철도 잘돼 있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편리한 교통의 스마트도시가 됐다.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을 끼고 있고 우리나라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생태환경을 갖고 있으며, ICT 등 첨단기업이 들어와 첨단산업의 메카, IT의 중심지 성남이 됐다.
첨단기업이 포진한 선진도시로 발전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성남시 50살을 축하하며, 성남에 뿌리 내리기를 참 잘했다 싶다. 내 고향은 복 받은 땅, 성남이다.
이승희 수정구 태평4동
*올해 시 승격 50주년을 맞아 성남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민들의 추억을 모아보고자 합니다. 성남에서 살면서 좋았던 점, 애환 등 재미있는 이야기와 사진을 보내주세요. 작품이 채택된 독자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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