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조선 왕실에서는 소설을 읽었을까?

조선 왕실에서 읽은 소설: 낙선재본 고전소설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4/05/20 [18:31]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조선 왕실에서 소설을 읽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유학자들이 소설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설마 왕실에서 읽었겠어?”

 

하지만 읽었습니다. 흔히 알고 있는 <홍길동전>이나 <춘향전> 등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진 낙선재본 고전소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낙선재는 1847년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이 후궁 경빈 김 씨를 위하여 지어준 창덕궁 안에 있는 건물입니다. 여기에 일군의 소설들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를 학계에서는 낙선재본 고전소설이라고 부릅니다.

 

▲ 창덕궁 낙선재  © 비전성남

 

6·25 때 북한군에 의하여 밀반출될 위기를 맞기도 했던 낙선재본 고전소설의 총량은 842천여 책에 이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후, 밖으로 유출된 작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2천여 책 가운데 1,300여 책은 창작, 700여 책은 중국소설을 번역한 작품입니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궁중 여성들의 소일거리로 읽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실에서 읽어서인지, 이들 책의 장정은 무척이나 고급스럽습니다. 책 표지와 본문 사이에 아무런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를 두고 있는데, 이를 공격지(空隔紙)라고 합니다. 종잇값이 비쌌던 조선이기에, 일반적인 소설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장식입니다.

 

▲ 낙선재본 고전소설의 글씨. 행을 꼭 맞춰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적혀 있다.  © 비전성남

 

게다가 글씨는 행을 꼭 맞추어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적혀 있습니다. 이들 글씨는 현재의 서예가들에게 교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분량도 만만치 않습니다. 짧은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10책 이상이며 가장 긴 작품인 <완월회맹연>180책이나 됩니다. 왕실의 여성들은 무료한 궁궐 생활 속에서 이러한 긴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다채로운 내용으로 위안을 삼았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몇 있습니다.

바로 14책의 <한조삼성기봉>입니다.

 

이 작품은 전생에 부부였던 사람들이 현세에 여성은 남성으로, 남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부부가 되지만, 여성이 된 남성은 전생에서 자신이 아내에게 한 짓과 같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결국 여성 독자는 <한조삼성기봉>을 통해 성을 바꿔 살아보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남성들이 여성을 택할 때, 말로는 덕성을 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미모를 본다는 점을 제기하며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삼종지도, 칠거지악 등에 시달린 여성들에게는 성을 바꿔 남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꿈을 이루어 보는 쾌거일 겁니다.

 

▲ 낙선재본 고전소설 <태원지> 본문 글씨  © 비전성남

 

<태원지>라고 하는 작품 하나를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다로 나간 주인공 임성과 그 일행이 여러 섬을 거쳐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조선판 <오디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성과 그 일행은 거치는 섬마다 괴물, 요괴, 구미호, 거인 등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결국은 다 이겨내고 나아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또 다른 공간을 만납니다.

 

여전히 중국을 중심으로 알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이 작품을 통하여 바다를 통하면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43책의 <양문충의록>도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주인공 양인광과 그 자손의 활약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출생의 비밀입니다. 양인광은 어려서 아버지 양세가 역적으로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어머니와는 남매처럼 지냅니다. 그 후, 출생의 비밀을 안 양인광은 아버지의 역적 행적을 없애는 데 모든 힘을 쏟습니다. 역사서의 기록까지도 지우게 됩니다. 역적의 자손은 벼슬을 할 수 없었던 조선의 상황에서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보물 창덕궁 낙선재  © 비전성남

 

왕실에서 읽은 낙선재본 고전소설에는 이보다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무척이나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가 강조되고 있는 현재, 이들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필요한 때입니다.

 

다만,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다행히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들 작품을 쉽게 현대어로 바꾸어 조선 왕실의 소설시리즈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특별기고 임치균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직무대행

한국학대학원 국문학 교수 

LIVE 궁녀가 읽어주는 소설낭독콘서트(호기심왕국 유튜브) 바로가기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