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1958년, 한국현대회화의 첫 미국 진출기(記)

K-이야기 속으로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5/02/22 [14:38]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 미국에서 열릴 《한국현대회화전》 출품작 선정을 위해 작품을 검토하고 있는 엘렌 프세티 코넌트 교수, 『대한뉴스』(1957년 8월 24일).  © 비전성남

 

19578월 하순, 원피스를 입은 서양 여인이 허름한 강당에서 쪼그리고 앉아 벽에 줄지어 세워놓은 200여 점이 넘는 그림을 신중하게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작품은 판넬이나 액자 형태였고 동양화와 서양화, 그리고 판화가 대부분이었다. 인물, 풍경, 정물화 등 사실적인 필치로 그린 그림들도 있었지만, 추상화도 제법 차지했다.

 

이상의 내용은 1957824일에 방송된 대한뉴스의 한 장면이다

 

방송의 주인공은 엘렌 프세티 코넌트(Ellen Psaty Conant, 1921-).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치던 학자이자 전시기획자로서, 미국에서 전시할 한국현대회화를 선별 중이었다.

 

▲ 한국 방문 중 화가들과 담소 중인 코넌트 교수, 1957년. (왼쪽부터 이응노, 도상봉, 코넌트, 이마동, 김영기), 이응노미술관 소장  © 비전성남

 

이를 위해 그녀는 1956~57년 동안 한국을 방문해 화가들과 수시로 만남을 가졌고 그 후 한국미술에 매료돼 신문지상에 미술평론을 다수 기고하기도 했다. 그녀가 서예가 김기승의 전시를 보고 한문과 한글을 융합해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었다고 극찬한 것이 그 예다(동아일보1959.11.12.).


그녀는 미술단체의 조언을 받아 약 207점의 작품을 살펴보고 이 중 107점을 일차로 선별했으며, 다시 62점을 최종 전시 대상으로 골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이로써 고희동, 김영기, 남관, 도상봉, 박래현, 박서보, 이응노, 이중섭, 장욱진 등 중견, 신진 작가 35명의 작품이 태평양을 건널 준비를 했고 이는 한국현대회화가 사상 최초로 미국에서 전시됨을 알리는 역사적인 출발점이었다.

 

▲ 《한국현대회화전》 전시팸플릿 표지, 미국 월드하우스갤러리, 195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소장  © 비전성남

 

당시 발간된 전시팸플릿의 표지를 보면 출품작 대신 태극기가 크게 인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서방세계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인상 깊게 알리기 위한 묘안이 아니었을지 생각된다.

 

코넌트 교수가 한국현대미술의 미국 전시를 기획하던 시기는 마침 한국과 미국정부가 한국국보전(1957.12~1958.6)을 미국 8개 도시 순회전시로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이 기간에 맞춰 현대미술을 선보이고자 했으며, 약 한 달간의 기간(1958.2.25.~3.22) 동안 뉴욕에 위치한 월드하우스 갤러리(World House Galleries)에서 개최했다.


▲ 《한국국보전》을 보도한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사, 1957년 12월 15일.  © 비전성남

 

당시 국내에서는 우리 회화가 처음으로 해외로 진출하게 됐다며 매우 기대에 찬 반응이었다. 이는 신라금관과 고려청자 등이 출품된 한국국보전이 성황리에 개최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뒤로하고 고려청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 수록된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는 지금까지 한국국보전에 대한 현지인들의 열띤 반응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한국현대회화전역시 고미술과는 또 다른 미감과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미국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두 전시는 6·25전쟁의 아픔이 충분히 가시지 않았던 어렵고 궁핍한 국내 상황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문화야말로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되살려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 한편 한국미술의 해외 진출을 열어준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K-한류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코넌트 교수는 전시가 끝난 후에도 종종 한국에 와 전시장을 방문하며 한국현대회화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주로 고미술을 대상으로 형태미와 특질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면, 그녀는 한국현대미술이 고유한 전통과 시대적 아픔을 내재적으로 승화해 새로운 표현을 창조한 데 주목하고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국의 현대미술은 역사적 고난 앞에서 가장 전념한다. 한국인들의 영혼과 믿음을 전통에서 찾아내는 용기, 그 진정성과 진지함, 의미 있는 형식과 기법의 탐색, 민족의 전통과 전설에 대한 의식적 환기와 더불어 도전적인 특징을 만들어 냈다.”  

 

특별기고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미술사학전공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