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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이야기 속으로]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직물

특별기고 이강한 교수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25/07/31 [19:30]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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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초부터 한반도를 다스렸던 고려 왕조의 후반부는 일반적으로 쇠퇴기로 알려져 있다. 13세기 전반 30여 년간 계속된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시작된 원제국의 간섭 때문이었다.

 

공민왕 재위 초인 14세기 중엽까지 계속된 이러한 상황은 후대인들로 하여금 이 시기를 일종의 암흑기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한 시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기에는 다소 이례적인 원간섭기라는 관용어구가 생겨난 것도 그로 인한 것이다.

 

이 시기 고려인들의 고통과 피해가 극심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는 원제국의 파출기관이 고려정부 옆에 세워졌으며, 북변의 영토를 상실했음은 물론 수많은 고려인들(특히 공녀들)이 가족과 헤어져 원으로 끌려갔다. 그 점을 감안하면 후대의 우리로서는 당시의 몽골 원제국을 결코 곱게 보기 어렵다. 고려인들로서는 정말 재수가 없었던, 야만적인 몽골의 병력과 관료들에게 유린된 시기로 고려 후기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시대에 대해서는 사실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다. 국왕들이 몽골의 혈통을 타고 태어난 혼혈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덜 고려적이었던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 그중 하나다.

 

고려의 왕이 된 이상 고려의 운명은 자신의 운명이기도 했기에, 고려의 내정을 개혁하는 동시에 외교에서는 한반도의 이익을 챙기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고려의 전통, 몽골의 관습, 제국 치하 중국의 제도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활용했다.

 

최초의 혼혈군주 충선왕(재위 1298; 1308-1313)이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50년 인생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냈지만 그의 재위기간 동안 정치, 재정, 군역제와 지방제도, 태묘 전례 등 개혁된 분야가 한둘이 아니었고,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는 한편으로 고려의 전통 역시 큰 폭으로 되살아났다.

 

이랬던 13~14세기 고려의 역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무역의 문제다. 충렬왕(재위 1274-1308) 이래 충선왕, 충숙왕(재위 1313-1330; 1332-1339), 충혜왕(재위 1330-1332; 1339-1343)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무역정책을 펼쳤다. ‘색목(色目)’, ‘회회(回回)’ 등 외국의 상인들을 자신의 어용상인으로 유치하거나, 무역상품을 직접 만들어 수출하기도 했다.

 

당시 만들어진 무역품의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직물인데, 그를 촉발한 결정적 영감은 제국으로부터 새로운 종류의 직물상품, 직금(織金)’이 들어오면서 제공됐다. ‘직금은 금·은 등으로 만든 금속 실을 써서 무늬를 표현한 직물을 이르는데, 중국의 금·은과 유라시아의 전통이 결합된 결과이자, 바탕직물인 견직물(비단)의 표면을 금으로 덮다시피 한 최고가의 직물 나시즈(nasij)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제품들이 한반도로도 대량 유입된 것으로, 고려 왕실이 제국으로부터 하사를 받는 한편으로 민간 무역을 통해서도 많은 양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이 새로운 상품에 그야말로 열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시즈 등의 직금은 밖에서 계속 사들이기에는 너무 비싼 상품이기도 했다. 이에 고려인들은 직접 직금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14세기 초의 유물에 해당하는, 이른바 온양 아미타불 불복장 등에서 고려산 직금들이 확인된다.

 

다만 직금의 자체 제작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직금의 품질을 결정할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견직물의 조달이 고려로서는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려도 옛날부터 품질 좋은 비단을 산출했지만, 중국에 비하면 그 양과 질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 문수사(文殊寺) 명황색용문사 (출처: 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  © 비전성남

 

그 결과 고려는 원래부터 한반도산으로 유명했던 모시로 승부를 걸게 된다. 직금의 핵심인 금·은사 시문 기법을 활용하되, 그 기법이 적용될 바탕직물을 견직물에서 모시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그런 경우일 가능성이 높은 실사례들이 1340년대의 문수사(文殊寺) 불복장 유물에서 발견되며, 사료에서는 직문저포(織文苧布)’라고 등장하는 경우들이 바로 이런 제품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직문저포(織文苧布)1320년대 이래 1350년대까지 몽골 원제국이 즐겨 찾았던 고려의 특산품인데, 10세기 이래 이슬람권의 술탄들을 위해 직물을 생산하던 서아시아 직조(織造) 워크숍으로서의 티라즈(tiraz)를 모방해 충혜왕이 1340년대 초 고려에 세운 삼현신궁을 통해 이런 제품들이 대량 생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과 서역에서 유통된 여러 직물 유물을 살피면, 고려의 변형된 직금 제품(직금 인피)들은 나름의 상품성과 경쟁력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되며, 특히 중국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 문수사(文殊寺) 주황석류문직금사 (출처: 수덕사 근역성보관 소장)  © 비전성남

 

다만 직문저포의 이런 위상은 향후 원제국이 사라지고 명나라가 들어선 14세기 말 변하게 된다. 중국의 인피직물 재배가 증가하고, 인피직물에 직금기법을 적용한 듯한 유사품들이 중국과 서역에서 등장하자, 새로이 한반도에 들어선 조선 왕조의 정부와 직조인들은 더 이상 직문저포만으로는 승부를 걸기 어렵게 됐다.

 

이에 새로운 상품이 등장했으니, 바로 종류가 다른 섬유를 섞어 짠 교직물(交織物)이 그것이었다. 양잠사(누에고치에서 뽑은 실)와 인피섬유를 혼직해 만든 교기(交綺)”, “면주(綿紬)”가 바로 그런 경우로, 이 두 교직물이 조선 전기인 15세기 전반 한반도 국내에서 활발하게 소비됨은 물론 명나라에 내다파는 주요 수출품이 됐다.

 

당시 중국 등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이런 교직물들이 한반도에서 성행하게 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고려 중기 이래 한반도 각지에서 전개된 현상, 양잠 문화(뽕나무 재배와 누에치기)와 모시·마포 재배 문화의 공존이 그것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양잠과 인피직물 재배, 목면 생산 등이 전통적으로 함께 번성한 지역들이 많다. 견사와 인피섬유를 합직한 교기, 견사와 목면섬유를 합직한 면주 등이 종래의 직문저포를 대신할 수 있었던 것도 고려 후기 이래 존재해 온 이러한 자생적 전통 덕분이었다.

 

이렇듯 우리가 흔히 암흑기라고 치부해 온 고려 후기가 사실은 한반도 나름의 차별성과 특질성으로 무장한, 그래서 대중국 수출품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던 직문저포와 교직물들이 성행하거나 배태된 시기였던 것이다. 한반도 대외무역의 번성기였던 동시에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는 과거를 봄에 있어 그 명암을 함께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경우라 하겠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선조들의 애환에 공감하는 한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뛰었던 선조들의 노력을 환기하는 데에도 눈길을 돌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기고 이강한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 전공)

 

한국학중앙연구원(https://www.aks.ac.kr):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