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이야기(1)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 가까운 남한산성에 오르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남한산성의 주 출입문인 남문까지가 성남시 구역이지만, ‘성남’이라는 이름도 성의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고 우리시 내에 지하철 8호선 산성역·남한산성입구역이 있으며, 남문 자체도 과거에 인조대왕이 입성했던 문으로 현재도 주 진입로로 이용되고 있어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한산성은 국가 사적 57호로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청에 대항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보이는 남한산성이 축성된 것은 1624~1626년(인조 2~4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10년 전이다. 당시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임시수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성곽의 형세는 둘레가 12.356km, 안으로 넓고 밖으로 깎아지른 듯 하늘이 만든 높은 성곽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강유역 쟁탈전이 심했던 삼국시대에 지형적으로 가장 요새가 될 수 있는 산이 바로 남한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성 내 행궁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건물터와 유물 일부가 발굴됨으로써 판교에서 발굴된 한성 백제시대 석실분과의 역사적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남한산성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최초로 ‘주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신라본기 문무왕 12년에 ‘한산주(광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4,360보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주장성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석축성으로 낮이 길다 하여 ‘주장성’ 또는 ‘일장성’으로 불렸다. 이 성의 길이가 현재 남한산성 본성의 길이인 7,545m와 거의 일치하고 있어 남한산성과 동일한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고학적인 근거로는 2005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었고, 2007년에는 토지박물관 조사에서 19㎏에 달하는 거대한 기와들을 저장한 저장소가 발굴돼 통일신라시기에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남한산성은 신라의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주장성의 중요성은 신라가 당을 격퇴한 ‘매초성’과 함께 신라의 요충지로서 당시 세계 대제국이었던 당을 격퇴하고 삼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이후 당은 신라까지 모두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때 당이 한강을 넘어 신라로 침략해 올 경우를 대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어 거점과 유사시 물자의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주장성으로 이 성을 쌓은 3년 후 신라는 매초성 전투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격퇴시키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이후 고려시대에도 몽고의 침입 때 남한산성은 다시 제 역할을 다하는데 1차 침입 때인 1231년에 공격을 받았으나 방어했고, 이듬해 1232년 11월 다시 몽고군이 침입, 수십 겹으로 포위해 공격했으나 끝까지 잘 막아내었다. ‘동국이상국후집’ 이세화 묘지명 기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겨울 11월에 몽고의 많은 병력이 수십겹으로 포위하고 온갖 계략으로써 공격하기를 여러 달에 이르렀다. 공(광주부사 이세화)은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사기에 따라 응변하되 뜻밖의 계획을 내어 사로잡고 죽임이 심히 많으니 오랑캐들이 불가능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삼국의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당·몽고 등을 격퇴한 대외항전의 장소다. 다음호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남한산성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도움말 : 성남시 학예연구사 진영욱 729-3013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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