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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능해(他人能解) - 타인만이 능히 이것을 열 수 있다

  • 한광운 수정구 단대동 | 기사입력 2014/04/24 [14:28]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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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들과 연둣빛 잎새들이 어우러져 상춘객들의 마음을 혼몽케 하는 아름다운 계절.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는 삶이 역겨워질 때 든든한 어깨로 선 지리산과 버선코처럼 고운 섬진강 물줄기를 떠올리라’는 지리산 시인의 시구가 생각나 섬진강을 달려야만 몸살이 가라앉을 거라는 핑계를 대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어른 손바닥만한 벚꿀을 망덕포구에서 봄바람에 게눈 감추듯 감추고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토지의 배경이 된 악양들판의 최참판 댁도 흩날리는 벚꽃눈을 맞으며 달려다니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도착할 때쯤 ‘운조루’라는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을 노니는 새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일순간 운조루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가득해 일정에 없던 운조루로 향했다. 운조루에 들어서니 고택의 모습은 과거에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한옥으로 한때는 99칸의 위용을 자랑하던 집이었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명당 덕분인지 역사의 질곡시대인 6.25 때 지리산 빨치산들이 이곳을 수탈하고 불태우려고 내려왔다가 그냥 돌아간 곳이 운조루라고도 한다.

여기저기를 돌아보다 집안 뒤켠에서 통나무 속을 파낸 쌀뒤주가 눈에 들어왔다. 그 쌀통에는 한자로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운조루에 내려오는 전통으로 집안 뒤편에 쌀통을 둬 배고픈 사람은 그 누구라도 먹을 만큼 퍼갈 수 있게 해두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쌀을 가지러온 사람이 집안 식구들과 마주치면 창피해할까 봐 집안사람들의 동선을 피해 집안 뒤편에 놔두었으며 만약 쌀통에 쌀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주인이 집안 식구들을 호통쳤다. 심지어 운조루의 굴뚝은 여느 양반집 같지 않게 낮게 설치돼 있었는데 이는 배고픈 사람들이 혹시 밥 지을 때 연기를 보고 더 배고파하지 않을까 하는 배려심의 발로라고 했다.

운조루를 둘러보면서 선조들의 삶이 명당자리에 집을 지어서 자자손손 부귀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배려하고 내가 아닌 우리를 알고 상생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같은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보는 계기도 됐다. 따뜻한 봄날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봄날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