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대게 죽음이 눈앞에 놓이면 살기 위해 말을 바꾼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결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애국이다”라는 나정태(62·삼평동) 화백은 2005년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를 읽고 그 감명으로 태극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열 두 분이 단지 동맹을 맺고 안의사는 약지의 마지막 마디를 잘라 붉은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쓰셨다”며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뜻을 태극기에 담아 작게나마 애국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나 화백이 최초로 그린 태극기는 안중근 의사가 피로 그린 태극기다. ‘흐르는 피는 안중근 의사의 피며 그분의 정신’이라는 나 화백은 그 후 태극기와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문자로 설명된 태극기를 풀이해서 그 당시의 색깔을 연구해 색을 입혀 우리의 전통 한지 위에 그림으로 나타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고종 황제의 칙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제작한 4괘와 태극무늬의 기(旗)를 만들어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부터 1948년 국기제작법이 통일 돼 현재의 태극기가 되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화폭에 담아냈다. “태극기의 흰 바탕은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이며 4괘는 하늘과 땅, 물과 불이요, 태극은 해와 달로 우주만물이 상호작용 하에 생성발전 순환의 의미”라는 나 화백. 타인의 상처를 보듬는 나정태 화가의 ‘찰과묘법’ ‘나는 그림을 그리는 시인이오’라는 그는 독학으로 45년을 오로지 그림에 몰두했다. 유년기에 사람과 자연의 생과 사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18세에 본격적으로 전통회화인 한국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화원인 조석진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민화풍의 그림을 그렸고 그 결과 ‘8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이산의 아픔을 그린 ‘기념비적 비’가 입선됐다. 그 후 수차례의 수상과 개인전을 통해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십장생 병풍을 그린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의 후손이기도 하다. 자신을 막돌이라고 하는 나 화백은 “그저 사람들이 가는 길에 발에 툭 채이면 밟거나 차버리는 막돌에 내 삶을 비추어 본다”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금 가고 깨진 돌을 조립하고 그 돌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고 한다.
찰과상을 입은 그의 돌 그림엔 소시민의 희로애락과 염원이 담겨있다. ‘시인은 사상을 글로 남기지만 나는 그림으로 남긴다’는 나 화백, 타인의 상처를 보듬을 줄 아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그의 예술은 상처를 치유한다.민화에 바탕을 둔 나 화백의 그림은 우리 문화의 오방색을 사용해 더욱 생동감을 준다. ‘갈망의 기도’, ‘우리 눈은 두 개’, ‘주님의 키스’ 등 수만여 점에 이른다. 태극기를 그릴 땐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경건해진다는 그는 4월 23일부터 3일간 성남 시청사에서 태극기 변천사를 주제로 40여 점의 그림을 전시했고 오는 8월에 태극기 전시회를 계획 중이다. 또한 2004년 경기도 광주의 ‘영은 미술관 초대작가공모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돌 속의 화가들’을 포함, 미술사와 자연의 만남을 주제로 한 100여 점의 작품으로 세계 순회전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조민자 기자 dudlfdk@hanmail.net 저작권자 ⓒ 비전성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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