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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이 담긴 남한산성 현절사

[성남의 역사 이야기]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5/05/20 [15:23]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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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이 담긴 남한산성 현절사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은 참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유적이다.그 안에 현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계속 항쟁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로서 인조의 항복 이후 심양으로 끌려가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 처형당한 삼학사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삼학사 가운데 가장 연장이었던 홍익한은 당시 52세였고 윤집은 32세, 오달제는 29세였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삼학사 말고도 많은 척화신들이 있었음에도 이 세 사람이 청군에 넘겨지는 희생양으로 낙점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홍타이지의 칭제 건원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들이 누구보다 격렬하게 비난하며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한 신하들을 성토했기 때문이었다.

홍익한의 경우 1636년 2월 ‘홍타이지가보낸 사신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나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조선의 골수 척화파까지도 결국 홍타이지의 은덕에 감화됐다면 향후 조선을 제어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처음엔 삼학사를 회유하려 했지만 삼학사는 단호했다.

대명조선국의 신하라고 자신을 표현한 홍익한은 ‘나는 조선의 신하이자 명의 신하이니 그대들 오랑캐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고 강경한 홍익한의 의지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윤집과 오달제에게 마음을 돌리면 처자를 데려와 청에서 살도록 도와주겠다는 홍타이지 회유시도는 실패한다. 노모와 임신한 아내를 두고 끌려온 오달제는 ‘고통을 참고 이곳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보기해서였다.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죽는것만 못하다. 속히 죽여 달라’고 응수했다.


윤집의 형 윤계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는데 청군 앞에서 무릎꿇기를 거부하다 혀가 잘리는 참확한 죽음을 맞은 인물이었다. 그런 윤계의 동생답게 윤집 또한 ‘난리 이후 처자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단호함으로 회유를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심양 서문 밖에서 죽음을 당했고 청인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뼈들이 쌓여 있는 형장에서 두 사람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집안의 종들을 시켜 초혼해 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삼학사가 보여준 조선의 충절은 청인들에게도 예사롭지 않았던 까닭에 어쩔 수없이 죽이기는 했지만 청조는 이후 삼학사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워주는 모습을 보였다.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매년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세계 어느나라 역사를 보아도 승자들이 적을 죽이고 그들을 위해 비를 세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예였다.

척화파와 주화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적장의 마음도 움직였던 삼학사가 보여준 충절의 마음은 기억해도 좋을 듯하다. 6월 호국보훈의달엔 남한산성 동문 북쪽 산기슭에 있는 현절사를 찾아가 삼학사와의 만남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김기숙 기자 tokiwif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