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광고

성남의 역사 이야기- 성리학자로 이름을 남긴, 정일당 강씨 이야기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5/08/21 [12:02] | 본문듣기
  • 남자음성 여자음성

 
 
 
▲ 정일당 강씨 사당     © 비전성남

성리학자로 이름을 남긴, 정일당 강씨 이야기
 
청계산 국사봉 아래 금토동 깊은 숲의 고즈넉함을 만끽하며 산길을 오르다 보면 정일당 강씨 묘라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궁금함을 가지고 발길을 재촉하다 보면 ‘정일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일당사당 입구가 보이고 입구 양쪽에 세워
놓은 커다란 돌들이 반겨준다. 사당에서 강씨 묘소까지는 800미터가량 더 가야 한다.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조선 유명 여류시인에 가려 정일당 강씨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정일당 강씨의 이름은 강지덕(姜至德)으로 영조48년인 1772년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의 문인 강희맹의 후손이다.
어머니 안동 권씨가 임신을 했을 때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어린 동자를 가리키면서 “여기 지극한 덕을 가진 인물이 있으니 너에게 부탁한다”란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안동 권씨는 그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낳았고그 딸을 지극한 덕이란 뜻으로 지덕(至德)이라 불렀다.
크게 벼슬을 하지 못해 사실상 몰락한 양반이었던 강씨의 아버지 강재수는 가난했지만 어린 딸에게 글을 가르쳤다. 당시여자들은 학문을 하고 글을 쓴다고 해도 시문이나 썼지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할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일당은 인간이 태어날 때 남녀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다른 여류 문인들과 달리 시문만 지은 것이 아니라 성리학을 좋아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말씀을 정성을 다해 탐구했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던 정일당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아버지의 3년 상을 정성껏 치르며 <예기>에서 배운 효를 몸소실천하기도 했다. 파평 윤씨로 몰락한 양반이었던 윤광연과 혼례를 올린 정일당은 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생계 때문에 공부를 중단하고 경상도와 강원도로 다니며 장사를 해야 했던 남편을 격려해 공부를 계속하게 했다.
정일당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경서에 두루 통해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깨달았고, 그것을 통한 정신 수양과 실천
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당시에 문명(文名)이 높았는데. 시는 대개 학문 또는 수신(修身)에 관한 내
용이 많다. 또 글씨에도 능했는데 특히해서(楷書)를 잘 썼다.
정일당 강씨는 시어머니 전씨와 시를 주고받으며 소통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정일당은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돌이 되기 전 죽어 부모로서 큰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힘든 환경을 극복하며 성리학을 공부했고 1832년 61세에 죽음을 맞이한 정일당은 여성 성리학자로 이름을남겼다. 저서로는 《정일당유고》가 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가을의 문턱에서 숲 속길도 걸어보고 사당에 들러 정일당 강씨를 떠올리며 정일당이 남긴 시조 한 편 감상하는 것도 좋은 가을맞이가 될 것 같다.

 
聽秋蟬 [청추선]
가을 매미소리를 들으며
萬木迎秋氣 [만목영추기]
온 나무들 가을빛으로 물들었고
蟬聲亂夕陽 [선성난석양]
매미소리 석양에 어지럽네
沈吟感物性 [침음감물성]
만물의 변화를 잠잠히 읊조리며
林下獨彷徨 [임하독방황]
숲숙에서 나 홀로 서성이네

 
김기숙 기자 tokiwif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