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분당구 운중동) 장서각은 2018년 특별전 ‘봉모(奉謨) - 오백 년 조선왕조의 지혜’를 6월 29일~12월 15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원 40주년과 조선왕실의 도서관인 장서각 건립 100주년을 맞아 마련된 전시로 장서각 소장 왕실 도서의 핵심을 만나볼 수 있다. 장서각의 왕실 도서는 정조가 영조의 모훈(謨訓) 자료를 봉안하기 위해 설치한 봉모당(奉謨堂)에서 출발한다. 봉모당에 보관된 핵심 자료인 훈서(訓書)는 역대 국왕이 통치를 통해 경험한 내용과 훈계의 뜻을 담은 책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와 후대의 왕이 될 왕자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요약해 지은 교훈서 『어제상훈(御製常訓)』을 비롯한 많은 훈서들이 장서각에 보관돼 있다. 훈서는 여러 개 항목으로 구성됐는데, 이 가운데 조선의 통치 철학과 국가 경영의 중심축이었던 ‘근학(勤學)’, ‘용현(用賢)’, ‘애민(愛民)’, ‘법조(法祖)’ 네 가지 항목을 중심으로 관련 자료에서 조선왕조가 지탱될 수 있었던 지혜를 엿본다. ‘근학’은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다. 학문의 주체는 바로 국왕이다. 국왕에게는 무한한 권력과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에 국왕이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국왕과 세자는 스스로 학문에 힘쓸 뿐만 아니라,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바로잡고 신료들을 이끌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춰야 했다. 당시 공부했던 책의 목록과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과 같은 결과물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치열히 학문에 매진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용현’은 어진 이를 임용해 그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당파를 넘어서 공정한 과정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국왕은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성균관 유생의 교육에 힘썼던 정조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유생을 꾸짖는 《시국제입장제생(示菊製入場諸生)》(보물 제1632-3호)을 남겼다. 이미 선발된 관료들에게도 끊임없는 학문에의 정진을 요구했다. 정약용 등이 포함됐던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가 그것으로 국왕은 국가경영의 파트너로 함께 일할 인재를 등용하고 교육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애민’은 나라의 근간인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고단한 삶을 어루만지려는 국왕의 의지를 담고 있다. 백성의 실정이 국왕에게 전달되도록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등 다양한 소통의 장을 열어놓았다. 또한 친경과 친잠을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독려할 뿐만 아니라, 가뭄이 들면 비가 오기를 기원하고 흉년이 들면 풍작이 들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국왕이 솔선수범해 씀씀이를 절약하고 검약함을 마음에 둬 절제하고자 했다. 『탁지정례(度支定例)』 등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의 규격을 정한 정례류들이 많이 편찬됐던 것도 그 때문이다. ‘법조’는 역대 국왕의 선정과 유훈을 본받는 사업이다. 국왕의 계보를 정리하고 역대 국왕의 선정을 기록한 ‘보감(寶鑑)’을 편찬했다. 법과 의례의 정비는 처음 만들어진 법전과 의례서를 기본으로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성종 대 편찬된 『경국대전』과 고종 대 편찬된 『대전회통』에서 그 변화상이 명확히 비교된다. 국가 방위에도 이 원칙이 적용돼 국초의 방위체제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새롭게 편성되는 모습을 보인다.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은 도성의 새로운 방위제도를 지도와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위의 항목들은 조선의 국왕이 다음 세대의 국왕에게 당부하고자 했던 핵심이다. 조선의 중흥을 위해 고심했던 역대 국왕들의 노력과 자취, 그리고 지혜의 정수를 봉모당의 도서를 통해 만나보기를 기대한다. 장서각 전시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시간은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30분까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09-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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