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때때로 실제와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조선의 임금 중에 비정했던 임금을 꼽는다면 아마 영조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숨지게 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럴수밖에 없었다고 영조를 두둔하는 이들과 그래도 아들을 죽인 것은 너무했다는 비판론이 동시에 존재한다. 정말 영조는 비정한 임금이자 아버지였을까? 본래 영조의 성품이 그렇게 비정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뒤늦게 이 딸을 얻으니 매우 기쁘고 사랑하였다. 뜻하지 않게 무술년(1718) 4월 초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겨우 한 돌이 지났다. 글을 지은 사람은 영조이고, 죽은 사람은 그의 첫째 딸인 화억옹주다. 왕자라고 하더라도 세자가 아닌 왕자들은 대궐 안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영조는 위로 형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1712년 19살이 되자 출합, 곧 대궐 밖에 거처를 마련해 나가 살아야 했다. 이때 아버지인 숙종은 창의궁을 마련해 줬다. 1718년 3월 9일 생모인 숙빈최씨가 아들의 집인 창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한 달 뒤인 4월 8일, 겨우 한 돌이 막 지난 딸이 죽은 것이다. 그 딸의 이름이 향염(香艶)이었으니, 아마도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상에 경황이 없던 영조는 딸의 시신을 수습해 바로 다음날 외할아버지 산소 옆에 서둘러 매장했다. 8월에 가서야 어머니의 묘 옆에 겨우 자리를 잡아 옮겼다. 이때 지은 글이 위의 <어린 딸 향염의 무덤에 넣는 지문(幼女香艶壙誌)>이다. 접으면 10cm도 되지 않는 작은 첩에 붉은 선을 그리고 글씨를 직접 썼다. 표지는 꽃과 새 문양의 비단(花鳥紋緞)을 사용해 정성을 다했다. 영조는 서종제의 딸을 맞았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다. 대신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정빈이씨를 후궁으로 삼아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그중 첫째가 영조 24살에 처음 본 향염이었다. 그런데 갓 돌이 지난 향염을 어머니 상중에 잃고 말았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향염의 아래로 아들을 두니 효장세자요, 그 다음에 둔 딸이 화순옹주다. 또 딸의 어머니인 정빈이씨마저 1721년11월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정빈 이씨가 낳은 자녀를 유독 아끼며 사랑했다. 영조의 향염에 대한 사랑과 애통함은 늘그막에도 계속됐다. 80살의 영조는 향염를 추증해 ‘화억옹주’라고 하니, 죽은 지 무려 55년 만이었다. 또 향염의 태가 묻힌 곳에 직접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사망이 흔했던 조선시대이고 보면 왕자의 딸이라고 해서 그 안타까움이 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머니 상중이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묻은 딸, 갓 돌이 지난 어린아이, 그 어미마저 갑자기 죽은 불쌍한 딸을 위해 영조는 자신의 생이 끝날 때까지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정을 글에 또 돌에 새겼다. 영조를 비정했다 아니다 단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300년 전 영조나 300년 뒤 지금의 우리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임금이라서 지금의 우리보다 특별한 것도 없고, 자녀를 적게 두는 요즘 2남 12녀를 둔 영조시대보다 더 남다를 것은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모에게 자식은 마음이 저릴 만큼 안타까운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작은 첩장이 영조의 애절한 마음을 이해하는 작은 실마리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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