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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산책] “호환(虎患)을 퇴치하라”

훈련도감 군병들, 호랑이와 벌인 300년 전쟁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7/08/23 [09:42]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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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연간 훈련도감 군병들    © 비전성남
 
▲ 까치호랑이_국립중앙박물관    © 비전성남
 
도심에 나타나는 야생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불청객이다. 주택가로 내려와 소동을 일으키는 멧돼지는 위협적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는 드물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만약 호랑이가 지금의 멧돼지처럼 도심 곳곳에 출몰한다고 가정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비상사태가 내려지고, 전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이 가정의 상황은 과거의 우리 선조들에게는 당면한 현실이었다.

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것을 호환(虎患)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호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중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일 년의 절반을 호랑이 잡으러 다니고, 나머지 절반은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 문상하러 다닌다.” 중국 사람이 보기에도 조선에는 호랑이가 많았고 피해도 컸다는 이야기다. 호환이 심할 때는 한 지역에서 연간 수 백 명이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기도 했다.
 
호랑이를 죽이거나 포획하는 것을 ‘착호(捉虎)’라고 했다. 조선 전기에는 호랑이 잡는 특수 군인인 착호갑사(捉虎甲士)와 착호장(捉虎將)을 둬 대응했다. 그러나 활과 창으로는 오히려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냥감 신세가 되기도 했다. 17세기 이후에는 훈련도감의 군병들이 호랑이를 제압하는 선봉에 서서 맹위를 떨쳤다. 그후 약 300년간 호랑이와 군병들이 벌인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훈련도감 군병의 착호에 관한 기록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훈국등록(訓局謄錄)』, 즉 과거 도성의 수비를 맡았던 훈련도감에서 작성한 업무일지에 자주 나온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총으로 호랑이에 맞섰다. 조총은 재래식무기보다 살상력이 강하고 명중률이 높았기에 이전보다 훨씬 신속히 호랑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호랑이는 태조 1년(1392) 윤12월 자에 나온다. 도성 안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내용이다. 한양의 백성들과 첫 대면을 한 이 호랑이는 한양천도 이전부터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에 살고 있었다. 이곳의 터줏대감이던 호랑이들은 도성 안을 제집처럼 넘나들었고, 심지어 궁궐 안까지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호환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통계자료가 없지만, 심한 해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피해를 입었다. 예컨대, 선조 4년(1571) 10월, 하얀 눈썹을 한 늙은 백호(白虎)가 지금의 고양시 등지에 출몰해 사람과 가축 400여 두(頭)를 죽였다고 했다. 지금 들어도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에 분노한 선조는 호랑이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서 대규모의 사냥에 총력을 기울였다.

훈련도감이 해체된 1882년 이후 약 30년간은 민간의 전문 사냥꾼들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호랑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 시행한 ‘해수구제(害獸救濟)’책에 따른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호랑이의 개체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민생치안을 위해 호환은 국가 차원에서 대응했고, 그 중심에 훈련도감 군병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착호에 관한 놀랍고 충격적인 기록들을 들추어 보자면, 도심에 출몰하는 멧돼지가 순간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