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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남 역사 이야기(1)

  • 관리자 | 기사입력 2009/01/27 [14:46]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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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 향토유적 제8호 신종군 이효백(新宗君 李孝伯) 

왕실의 후예로 활쏘기 명수


타고난 궁술로 품계 더해, 호랑이 포획해 민심 안정도
활쏘기로 무술 외에 인륜의 도를 배워
 
우리 한민족은 역사에서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중국인들이 우리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의 [夷]는 바로 ‘大弓’을 의미하는 것이며, 큰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夢)은 곧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고구려의 방언이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또한 활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다.
신종군 이효백의 자는 희삼(希蔘)이고, 덕천군 이후생의 아들이다. 조선 제2대 정종대왕의 손자로서 세조 때부터 성종 때 55세로 별세하기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효백이 별세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조회를 중지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전례와 같이했다. 시호(諡號)는 공간(恭簡)으로 일을 공경해 윗사람에게 이바지하는 것이 공(恭)이요 평이(平易)하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하루 종일 쏘아도 정곡에서 벗어나지 않아
이효백은 활쏘기에 특출한 실력을 지녔던 인물로서 하루 종일 쏘아도 정곡(正鵠, 과녁의 중심)에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에는 과녁의 중앙에 신분에 따라 다른 짐승을 그려 넣은 과녁을 사용했다. 천자는 흰 바탕에 곰을 그린 웅후(雄侯), 제후는 빨간 바탕에 큰 사슴을 그린 미후(麋侯), 대부는 호랑이나 표범을 그린 포후(布侯), 선비(士)는 사슴과 돼지를 그린 포후(布侯)를 사용했다.
1459년 세조가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했을 적에 최적(崔迪)과 짝이 돼 각각 화살 30개를 가지고 과녁을 쏘라고 명했다. 효백이 연속해 29시(矢)를 맞히니, 세조가 크게 칭찬하고 명해 당상(堂上)에 승진시켰으며, 조금 뒤에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승진시켰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했을 적에는 세조가 친정(親征)하고자 해 효백을 선봉장으로 삼았다. 1468년에 무과(武科)에 합격하니, 또 명해 품계를 더하게 했다. 종친(宗親)은 과거 응시를 금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그해부터 특별히 부시를 허락했다.
이효백의 탁월한 궁술은 소나무로 만든 두께 7푼(分)의 방패를 1백 보 거리에서 쏘아 5촌(寸)을 뚫었을 뿐 아니라, 예종 임금이 즉위하던 해에는 열무정(閱武亭)에서 준갑(蹲甲, 실물의 갑옷을 물건에 걸어서 사람이 웅크린 모양을 만들어 화살의 표적으로 삼던 것으로서 이것을 쏘게 한 것은 실전과 같은 시험)을 쏘게 했더니, 이효백 한 사람만이 갑옷의 미늘[札]을 꿰뚫었다. 또 호랑이가 청량동(淸凉洞)에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임금의 명을 받아 착호갑사(捉虎甲士) 및 겸사복(兼司僕) 등을 거느리고 양주ㆍ광주 등지에 가서 호랑이를 포획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다음날 이효백은 신종군(新宗君)에 제수됐다.

묘소는 석운동, 묘지석은 경기도박물관에
활쏘기는 군사적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활쏘기는 단순한 무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맹자는 학교의 교육 목적이 인륜을 밝힘에 있다고 하면서 그 내용 가운데 활쏘기도 한 과목으로서 언급하고 있다. 즉, 활쏘기(序)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의 양성이 아니라 활쏘기를 통한 인륜의 도를 밝힘이 그 목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의 활쏘기는 오늘날 체육 교과목이 지향하는 바와 유사한 교육이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처럼 왕실의 후예로서 궁술에 특출한 실력을 지녔던 인물의 묘소가 성남시 석운동에 있으며, 그의 묘지석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무덤이 있는 자리는 이효백이 늘 활 쏘고 사냥하던 곳이었다. 공이 이 언덕에 올라서 걸상을 놓고 멀리 바라보면서 기뻐하기를, “반드시 이곳에 묻히련다.” 하였다. 어느 날 활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자료제공 : 성남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글 정리 : 윤종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