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 지났다. 어버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사람에 따라 온도 차가 있다. 누구는 그저 죄송함으로, 누구는 아쉬움으로, 또 누구는 고마움으로 어버이를 생각한다. ‘난 부모님께 참 잘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선의 22대 정조 임금조차 어머니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왕의 어머니지만 대비가 되지 못했고,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왔지만 중전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왕세손이었던 아들 정조가 국왕이 돼 자궁(慈宮)이 됐다. 혜경궁은 개인적으로 아쉬울 수 있으나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들이 있었으니 부모로서 행복했을 것이다.
정조는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자 장기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첫 번째 기획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모셔오는 일이었다. 사도세자는 1762년 양주의 배봉산 언덕에 묻혔다. 무덤의 이름은 ‘수은묘’였다. 그 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바로 ‘영우원’으로 무덤의 격을 높였다. 1789년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와 ‘현륭원’이라 부르고 매년 찾아와 참배했다.
이번에는 수원을 화성으로 승격하고 중요한 관방(關防)으로 여기면서 성 축조작업에 들어갔다.
1795년 화성행궁이 모습을 드러내자 두 번째 기획을 추진했다. 1795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회갑을 맞는 해였다. 조선시대 회갑연은 보기 드문 큰 경사였다. 자식은 어버이의 회갑을 맞아 이를 경축하며 기쁨을 표하는 것이 도리였다. 더욱이 국왕의 어버이가 아닌가. 정조는 정사를 보면서 백성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조선시대 복식은 신분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었다. 큰 잔치에 복식이 빠질 리 없다. 각 신분마다 법도에 따라 옷이 정해져 있다. 그러니 잔치에는 꿩 무늬가 있는 적의(翟衣)를 입어야 한다. 여기에 대비를 상징하는 색은 자적색이다. 왕비의 색은 대홍색이며, 세자빈의 색은 아청색이다. 혜경궁은 과연 무슨 색의 적의를 입어야 할까? 정조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정조는 여러 유신들에게 혜경궁의 복색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하라고 수차례 걸쳐 명을 내린다. 그러나 전례(前例)가 없어 알 수 없다며, 임금의 뜻을 따르려 한다는 의견만 올리니 정조의 결단을 기다려야 한다. 고민 끝에 정조는 천청색(淺靑色, 아주 엷은 파란색) 한 가지 색이 가장 근사하다며 이 색깔로 적의를 만들어 착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하교를 내린다. 정조의 말을 들어보자.
“혜경궁께서 입으실 적의의 복색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진실로 유신이 의논한 말과 같다. 다만 마땅히 옛것을 인용하고 지금의 것을 참조하여 의의에 맞게 창정해야겠는데 자색은 이존(二尊)하는 혐의가 있고 흑색은 예(例)를 다르게 하는 뜻이 없으며, 홍색과 남색은 각각 쓰고 있는 바가 있어 원래 인용할 만한 사례가 없다. 내 생각에는 오직 천청색 한 가지가 근사한데 본시 청색은 동조의 복색이었으나 자색으로 제도를 정한 뒤부터는 치워두고 쓰지 않았다. 지금 천청색으로 작정을 함은 곧 청흑의 의의를 취한 것인데 동조의 적의를 자색으로하여 홍흑의 의의를 취한 것과 오묘하게 맞고 또한 차등도 있게 된다. 이미 대신에게 물어보니 대신의 뜻도 그러하다 하므로 혜경궁의 복색을 천청색으로 정하라.”
정조가 고민한 것은 단순히 복색이 아니다. 천청색을 선택한 것은 청색이 원래 동조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동조는 왕대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위상을 복색으로 회복하고자 했던 정조의 속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