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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essay] 할머니가 고구마를 남긴 이유

민경화 | 수정구 태평동

  • 비전성남 | 기사입력 2019/12/23 [14:29] |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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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고구마를 남긴 이유
민경화 | 수정구 태평동
 
가정용 카트를 끌고 장을 보러 태평동 중앙시장으로 나섰다. 한참을 가다 보니 이게 덜그럭, 덜그럭, 탈탈탈 소리를 낸다.

그러다가 앗, 쉿! 초겨울 구름 사이로 삐쭉 내민 햇살에 얼굴을 묻고 살짝 낮잠을 청한 시장 길가 한편의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의 잠을 깨울까 봐 걸음을 멈췄다. 앞치마 밑에는 고구마와 단호박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어느새 인기척에 눈을 번쩍 뜨고는 일어나 고쳐 앉으셨다.

‘에효... 조금만 더 주무시지.’ 미안한 마음에 맛있어 보이는 고구마를 한 봉지 샀다.
“에구, 이제 다 팔았네. 새댁이 떨이여.”
“할머니, 거기 한 무더기 남았는데 제가 떨이에요? 그거 다 파셔야죠.”
“아녀, 이거 쓸데가 있어. 그거나 갖다가 맛나게 쪄 먹어. 아주 달어.”
“네, 할머니. 많이 파세요~”
 
할머니의 단잠을 깨운 죗값(?)은 충분히 치렀으니 마음이 편했다. 장을 본 뒤 서둘러 돌아와 이사 올 때 정산이 덜 된 관리비를 내려고 관리사무소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데 바로 앞에서 검은색 봉지를 들고 다리를 절며 올라가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어엇? 자세히 보니까 잠시 전 시장에서 본 할머니 아닌가? 우린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도 나를 알아보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요거좀 요 위층 경로당에 갖다 줄라고”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검은봉지를 내보이셨다. 고구마였다. 순간 시장에서의 일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고구마가 조금 남았는데 날더러 “떨이”했다고 하신 말. 그리고 그 ‘딴데’ 쓰신다고 했던 곳이 바로 우리 아파트 경로당이었던 것이다.

고구마를 다 팔지 않고 일부러 남겨 가지고 오신 할머니. 그 말씀 속에 행복감과 인생의 여유가 넘쳐 보이고 아름다웠다. 내게 인생의 멋을 가르쳐준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독자 수필과 추천도서(원고지 5매 내외, A4 1/2장 내외), 사진(성남지역 풍경·사람들 - 200만 화소 이상)을 모집합니다. 2020년 1월 7일(화)까지 보내주세요(주소·연락처 기재).채택된 작품은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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